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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96

    2024.12.02 by 웅석봉1

  •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95

    2024.12.01 by 웅석봉1

  •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94

    2024.11.30 by 웅석봉1

  •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93

    2024.11.28 by 웅석봉1

  •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92

    2024.11.27 by 웅석봉1

  •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91

    2024.11.26 by 웅석봉1

  •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90

    2024.11.25 by 웅석봉1

  •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89

    2024.11.24 by 웅석봉1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96

★판테온을 거쳐 트레비 분수와 스페인 계단을 만났다. 유럽 도시가 흔히 그렇듯 로마에도 분수가 많으며, 분수들은 거의 예외 없이 사람을 불러 모은다. 트레비 분수는 로마에서 제일 크고 관광객을 가장 많이 끌어모을 뿐만 아니라 ‘돈이 마르지 않는 샘’이기도 하다. 관광객들이 오뉴월 꽃밭의 꿀벌처럼 분수 주변에 모여 동전을 던져주는 덕에 가톨릭 자선단체는 해마다 20억 원이 넘는 돈을 얻는다. 동전을 던지기에 적당한 거리까지 다가서려면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그림 앞에서 인증샷을 찍을 때만큼 애를 써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젤라토를 든 채 분수에 접근하는 건 죄악이라고 말하고 싶다. 동전을 던지고 나서 옷에 묻은 젤라토를 닦아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이름이..

기행문 2024. 12. 2. 12:04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95

★고대의 건축물과 에마누엘 2세 기념관을 빼면 로마는 이탈리아의 다른 유명한 도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사 인물과 도시의 이름을 붙인 광장, 중세기 귀족의 저택이었다가 공공기관이나 박물관이 된 팔라초(Palazzo, 정무를 보는 관청이나 귀족의 대규모 주택 형식을 가리키는 보통명사),  로마 신화의 캐릭터와 이야기를 모티브로 사용한 분수, 오래된 교회와 예배당, 테베레강의 다리. 유명 예술가들이 출입했다는 카페와 레스토랑, 영화에 나온 거리와 계단이 도시 전체에 널려 있었다. 우리는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면서 거리의 풍경을 즐겼다. 에마누엘 2세 기념관 앞 베네치아 광장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통일을 기념하려고 만든 이 타원형 광장은 차량이 줄을 잇는 대형 로터리가 되어 있었다. 기념관을 나와 왼편으..

기행문 2024. 12. 1. 12:43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94

★가리발디의 영웅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862년에는 4만 군사를 끌고 오스트리아제국 군대를 제압해 베네치아를 탈환했으며 1867년에는 교황청을 가장 악독한 비밀 결사체라고 비난하면서 로마로 진군했다. 로마를 이탈리아왕국의 수도로 선언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르데냐왕국의 토리노에 머물렀던 에마누엘 2세는 프랑스 군대가 프로이센과 싸우기 위해 떠나자 지체 없이 로마를 점령해 통일운동의 마침표를 찍었다, 가리발디는 단순한 군사 영웅이 아니라 확신에 찬 휴머니스트이자 투철한 공화주의자였다. 노예제 폐지에 대한 신념이 불확실하다며 링컨 미국 대통령의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로 강력한 신념의 소유자였던 그는, 모든 국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정치 개혁을 추진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

기행문 2024. 11. 30. 08:47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93

★가리발디가 통일 전쟁에 다시 뛰어든 1860년 무렵, 통일운동의 지도자는 사르데냐왕국의 에마누엘 2세와 수상 카밀로 카보우르였다. 그들은 프랑스와 제휴해 오스트리아를 꺾고 반도의 중부와 북부 이탈리아를 대부분 평정했지만 갈 길이 아직 험난했다. 사람 다리 모양인 이탈리아반도는 네 토막으로 나뉘어 있었다. 발끝의 시칠리아섬을 포함해 복사뼈까지 남부는 시칠리아왕국, 로마가 있는 정강이 가운데 토막은 교황령, 사르데냐섬을 포함해 알프스까지 무릎 앞쪽은 사르데냐왕국이었고, 무릎 뒤쪽의 베네치아 왕국은 여전히 오스트리아제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가리발디는 그런 상황에서 혜성처럼 나타나 단숨에 민중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붉은 셔츠를 입은 전사 1천여 명을 이끌고 남부로 가서 수십 배 규모였던 시칠리아 군대를..

기행문 2024. 11. 28. 09:25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92

★1850년대까지 30년 동안 시칠리아와 나폴리서부터 밀라노와 베네치아까지 전국에서 일어난 민중혁명과 무장투쟁은 모두 실패했는데, 이 시기의 지도자는 주세페 마치니였다. 스무 살에 혁명운동을 시작한 제노바 태생의 법률가 마치니는 두 번이나 사형선고를 받았고 고달픈 망명 생활을 했지만, 공화제 통일국가 수립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에마누엘 2세의 군주제 통일국가를 끝까지 비판한 그가 1872년 세상을 떠나자, 피사에서 열린 장례식에 10만 명의 추모객이 모였다. 마치니가 공화국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직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면 오스트리아제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여러 왕국과 도시국가를 통합해야 했다. 그런 일은 법률가나 정치인이 아니라 군사 지도자의 몫이었다. 그 과업을 마법처..

기행문 2024. 11. 27. 12:04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91

★에마누엘 2세 기념관은 로마에 있지만 이탈리아 전체를 대표하는 시설이다. 전면에 있는 기마상의 주인공은 이탈리아 통일을 이끈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이고, 기마상 양편에 부조(浮彫)한 사람들은 건국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들이다.  에마누엘 2세뿐만 아니라 가리발디, 카보우르, 마치니 등 이탈리아 통일 주역들의 유품도 전시하는 이 기념관은 현대사와 관련한 기획전을 꾸준하게 연다. 이탈리아 현대사와 관심이 있는 여행자라면 시간을 넉넉하게 들일 만했다. 이탈리아공화국의 역사는 70년이 겨우 넘으며, 왕국을 포함한 통일국가의 역사도 15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통일의 계기는 나폴레옹 전쟁이었다. 19세기 초 프랑스 군대는 수많은 왕국과 도시국가로 갈라져 있던 이탈리아반도 대부분을 점령해 강제로 통합했..

기행문 2024. 11. 26. 09:39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90

★로마제국은 건축 기술의 발전에 큰 획을 그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아치와 돔이다. 콜로세오의 아치와 판테온의 돔은 유럽 건축에 크고도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물리학이 아직 출현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 어떤 방법으로 그토록 큰 돔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판테온과 비슷한 규모인 피렌체 두오모(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가 나타나기까지 무려 1천 300년이 걸린 것으로 보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피렌체의 돔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도 판테온을 비롯한 로마 건축물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끝에 해결책을 찾았다고 한다. 판테온 건축양식의 힘은 지금도 여전히 강력하다. 서구 문명의 영향을 받은 모든 지역에서 사람들은 관청과 대학 건물에 둥근 지붕을 얹으려고 애쓴다. 일본 육사를 나온 박정희 대통령이 여..

기행문 2024. 11. 25. 09:35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89

★판테온은 2세기 초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지었다. 아테네 제우스 신전과 아크로폴리스 사이에 커다란 아치형 문을 만든 바로 그 사람이다. 그전에도 판테온이 있었지만, 티투스 황제 때 불에 타버렸다.  로마 판테온은 후대 황제들이 여러 차례 보수공사를 했고 7세기부터는 교회로 사용했기 때문에 외부 대리석 조각과 청동 타일이 뜯겨나가고 내부 벽의 그림과 조각상이 달라지긴 했지만, 집 자체는 온전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렇지만 용도는 계속 바뀌었다. 다신교 시대에는 만신전(萬神殿)이었고, 기독교 국교화 이후에는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르네상스 이후 교황청의 권력이 약해지자, 국립묘지 역할이 덧붙여져 화가 라파엘로를 비롯한 예술가들과 에마누엘 2세 등 권력자들의 관이 그곳에 안치되었다. 사람들이 판테온에 오..

기행문 2024. 11. 2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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