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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88

    2024.11.23 by 웅석봉1

  •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87

    2024.11.22 by 웅석봉1

  •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86

    2024.11.21 by 웅석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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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0 by 웅석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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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9 by 웅석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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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8 by 웅석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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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7 by 웅석봉1

  •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81

    2024.11.16 by 웅석봉1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88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이 유명한 질문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오래 사귀지도 않았고, 그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정치 행위를 한 적도 없다.  안토니우스가 아내 옥타비아를 버리고 클레오파트라와 혼인한 것이 옥타비아누스와의 동맹이 깨지는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클레오파트라가 아니었더라도 로마가 공화정을 유지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공화정이 폐지되었을 때 포로로마노의 정치적 기능도 함께 끝났다. 공화정의 집정관이나 호민관과 달리 황제는 공론장을 원하지 않았다. 황제들은 저마다 다른 장소에 자기의 이름을 붙인 ‘포로’를 만들었고, 포로로마노는 권력자의 기념사업이나 시민들의 개인적 종교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포로로마노가 건물로 가득 ..

기행문 2024. 11. 23. 09:37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87

★폐허가 된 원로원 마당에서 절충하기 어려운 것들이 공존했던 인간 카이사르의 생애를 돌아보았다. 그는 귀족이었지만 평민파에 가담했다. 어떤 술수도 마다하지 않고 권력투쟁을 벌였지만, 이긴 후에는 정적을 너그럽게 포용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해 공화정을 사실상 폐지했지만, 민중의 소망과 요구를 존중했다. 원로원의 부패 기득권 세력을 무너뜨리고 시민의 권리를 확장했으며 빈민과 해방 노예, 속주의 민중을 돕는 개혁 조치를 밀어붙였다. 보기 드문 정치적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사생활도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유부녀와 염문을 뿌렸지만, 그로 인해 중요한 인간관계를 망치지는 않았다.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힘을 이용해 남동생을 누르고 권력을 다지도록 지원했으면서도 연인관계를 공식 언급하지는 않았으며, 클레오파트라가..

기행문 2024. 11. 22. 09:23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86

★카이사르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1년을 365.25일로 정한 ‘율리우스력’을 제정하고 국립도서관과 극장을 만들었으며, 성벽을 허물어 도시를 확장하고 영토를 18개의 속주로 재편해 총독을 새로 파견했다. 그라쿠스 형제가 살해당하면서 좌초했던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곡물에 대한 국가 구매제도를 도입했으며 자격이 있는 속주 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원로원의 계엄령 발동 권한을 폐지하고 시민 배심원단을 도입하는 사법개혁 조치를 했으며, 교사와 의사를 우대하고 군인의 봉급을 크게 올렸다. 카이사르는 2년 후 종신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가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지만, 로마의 공화정은 사실상 이때 막을 내렸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자신감이 지나쳤던 나머지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서도 정적을 숙청하지 않았고, 그..

기행문 2024. 11. 21. 09:46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85

★그러나 카이사르는 사사로운 욕심으로 공직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세제 개혁을 단행해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고, 게르만족과 화친을 맺어 변방의 정세를 안정시켰으며, 집정관 임기를 마친 후에는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해 게르만족을 격파하고 라인강 서쪽 지역을 평정했다. 잉글랜드 원정에 실패하는 등 여러 전투에서 패하기도 했지만, 그는 7년 동안 프랑스와 독일을 포함한 서유럽 일대에 로마제국의 패권을 확립했다. 지나치게 큰 성공은 의심과 질시를 부르기 마련이다. 로마 원로원의 귀족들은 야심가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 직위를 전격 박탈했고, 격분한 카이사르가 4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향하자,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에 군대를 해산하라고 요구했다. 루비콘강은 아드리아해로 흐르는 이탈리아반도 북동부의 작은 강인데, 로..

기행문 2024. 11. 20. 09:19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84

★카이사르는 귀족 가문 출신의 지식인이자 걸출한 군인이었다. 독재자 술라(B.C.138?~78?)의 미움을 산 탓에 아시아 주둔 부대에 숨어 지내는가 하면 그리스로 가는 길에 해적한테 붙잡혔다가 몸값을 내고 목숨을 건지는 등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여러 차례 생사 위기를 겪었다. 로마에서 군 장교로 활동을 시작한 카이사르는 스페인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B.C.65년 재무관이 되었으며 로마의 유명한 정치인 아내들과 어울리면서 숱한 스캔들을 뿌렸다. 스페인 서부지역 총독 시절 포르투갈 일대를 평정해 이름을 떨친 다음 B.C.59년 로마로 귀환해 집정관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마흔한 살이었다. 카이사르는 정치적 술수도 뛰어났다. 지중해 해적을 소탕한 폼페이우스, 로마의 최고 갑부 크라수스와 손잡고 ‘삼두정치’..

기행문 2024. 11. 19. 09:19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83

★로마군단의 전투 대형은 아테네 중장보병과 비슷했지만, 군대를 활용하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점령지를 일시적으로 약탈하고 돌아왔던 아테네군과 달리 로마군단은 점령지에 장기 주둔하면서 도시를 건설하고 조세를 징수했다.  로마 정부는 총독을 파견해 점령지를 다스렸고, 점령지와 로마를 직선도로로 연결함으로써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는 데 필요한 물류 인프라>를 구축했다. 로마군단은 방패와 창과 양날 단검으로 무장한 100명 단위의 백인 대, 백인 대 다섯을 모은 대대, 10개 대대를 유기적으로 편재한 군단을 핵심 전력으로 삼고 투석 병과 보급병 등 지원부대를 결합한 구조였는데, 백인대장은 노련한 병사가, 대대장은 선출 지휘관이, 군단장은 전직 고위급 정치인이 맡았다. 전성기에 25개 군단 30만 명이나 되었던..

기행문 2024. 11. 18. 12:32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82

★로마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일 것이다. 그러나 로마에는 그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 거의 없다. 그나마 그가 잠시라도 머물렀을 원로원 건물이 보이기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카이사르는 B.C. 1세기 중반 아주 잠깐 최고 권력자로 등극했을 뿐 황제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로마의 정치체제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제국의 황제 또는 강대한 국가의 절대 권력자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캐사르, 카이저, 시저, 차르 등은 표기법과 발음이 다르지만 모두 카이사르에서 나온 말이다, 로마신화가 그리스신화의 복제품인 데서 알 수 있듯, 로마는 여러 면에서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정치체제도 그랬다. 왕정에서 시작..

기행문 2024. 11. 17. 11:42

<제주올레, 길 위의 풍경> 81

★3천 년 전 이탈리아반도 중부 지역에는 에트루리아인이 독립 문명을 이루고 살았다. 그들은 언덕에 집을 짓고 저지대에는 시신을 매장했다. 그때 여러 부족 집단이 이탈리아반도로 이주해 와서 에트루리아인과 대립했는데, 라틴어를 쓰는 부족 하나가 B.C. 8세기경 테베레강 동쪽 언덕에 작은 왕국을 세웠다. 라틴인들은 에트루리아인의 묘지가 있는 저지대에 흙을 채우고 배수로를 냈으며 바닥에 돌을 깔아 시장을 만들었다. 종교시설과 행정기관, 사법기관이 들어오자, 그 저지대는 도시의 경제, 정치,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포로로마노가 탄생한 것이다.  로마가 공화정을 실시한 때 이곳에서 정치인들은 연설로 시민들의 마음을 샀고, 장군들은 개선 행사를 열었으며, 시민들의 축제를 했다. 포로로마노 구경은 폐허 산책과 비슷했..

기행문 2024. 11. 1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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