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대까지 30년 동안 시칠리아와 나폴리서부터 밀라노와 베네치아까지 전국에서 일어난 민중혁명과 무장투쟁은 모두 실패했는데, 이 시기의 지도자는 주세페 마치니였다. 스무 살에 혁명운동을 시작한 제노바 태생의 법률가 마치니는 두 번이나 사형선고를 받았고 고달픈 망명 생활을 했지만, 공화제 통일국가 수립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에마누엘 2세의 군주제 통일국가를 끝까지 비판한 그가 1872년 세상을 떠나자, 피사에서 열린 장례식에 10만 명의 추모객이 모였다. 마치니가 공화국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직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면 오스트리아제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여러 왕국과 도시국가를 통합해야 했다. 그런 일은 법률가나 정치인이 아니라 군사 지도자의 몫이었다. 그 과업을 마법처럼 해치웠던 군사 지도자는 주세페 가리발디가 에마누엘 2세를 통일국가의 왕으로 추대했을 때 마치니의 꿈은 일단 멀어지고 말았다.
이탈리아 통일 드라마의 공식 주연은 에마누엘 2세였지만, ‘신 스틸러 (Scene Stealer)는 단연 가리발디였다. 그가 없었다면 그 드라마는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니스 출신 청년 가리발디는 해군 복무 중에 마치니의 영향을 받아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가 궐석재판(闕席裁判, 피고인이 법정에 출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남미로 도망간 그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혁명군으로 활동하면서 전투 경험을 쌓은 후 귀국해 농사를 지으면 지냈다.
유시민의 『유럽 도시 기행 1』 (주, 도서 출판. 아름다운 사람들) 120~131쪽에서 인용.
*각설하고 올레길을 걸어보자.
▲길은 사계 포구와 해수욕장으로 이어지고 바다에 떠 있는 형제섬은 더욱 사이가 벌어진다. 아마도 어젯밤에 형제간에 시비가 있었나? 아니올시다. 형제는 그대로인데 보는 사람들의 위치가 바뀌니 그렇게 보일 뿐임은 세상 이치와 다르지 않다.
해안도로를 달리는 길은 <사계 체육공원>도 지나 발자국 화석 발견지에 다다른다. 발자국 화석이라,……,중기 구석기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치 있는 화석층이고 2009년 천연기념물 제464호로 지정되었다. 바다만큼이나 푸른 하늘에 아스라이 먼 인류의 발자국이 남은 곳이라니 만년을 살아온 듯이 아늑함이 밀려온다.
조상의 발자국이 찍힌 해변의 바위에 걸터앉으니 갑자기 햇살이 눈을 찌른다. 나는 모자를 깊이 눌렀다. 준비한 간식을 풀고, 막걸리 통을 따서 종이컵에 한 잔 가득 채웠다. 잔을 들어 저 어디쯤 있을 그 시절 고혼들을 위하여 첫 잔을 뿌렸다. 그리고 다음 잔은 내가 천천히 마셨다.
두어 잔을 마시니 주기가 오른다. 이때 마침 <사계리 발자국 화석>이란 시가 생각난다. <다녀가셨군요~당신>이라며 발자국 당신을 그리워한 이대흠(1968~ )의 시를, 시를 사랑하는 올레꾼이 읊어본다. 그 전문은 이러하다.
<사계리 발자국 화석>
다녀가셨군요~당신/ 당신이 오지 않는다고 달만 보며 지낸 밤이 얼마였는데/ 당신이 다녀간 흔적이 이렇게 선명히 남아있다니요/ 물방울이 바위에 닿듯 당신은 투명한 마음 발자국을 남기었으니/ 그 발자국 몇 번이나 찍혔기에 화석이 되었을까요//
아파서 말을 잃은, ~당신/ 눈이 멀도록 그저 바라다보기만 하였을 당신/ 다녀갈 때마다 당신은 또 얼마나 울었을까요/ 몹쓸 바람 모슬포 바람에 당신 귀는 또 얼마나 쇠었을까요/ 사랑이 깊어지면 말을 잃는 법이라고/ 마음 벼랑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를 데려와/ 당신 발자국 위에 세워봅니다//
소금간 들어 썩지 않을 그리움, 입 잃고 눈먼 사랑 하나/ 당신이 남긴 발자국에 새겨봅니다/ 다녀가셨군요~당신//
술은 시를 부르고 시는 고향을 부르나니,……,나는 언젠가 걸어보았을, 고향 같은 해안 길을 걸어 나가니, 송악산이 가까이 다가오고 그 앞쪽이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마라도로 가는 여객선 선착장이다. 선착장 입구, <산이물>이라는 표지석 아래에는 맑은 물이 솟아 바닷물과 어울린다. 바위 밑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다.
길은 송악 공원을 한 바퀴 돌 모양이다. 송악산 일대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전쟁 잔상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유적지다. 해안과 산 중턱 곳곳에 동굴 진지가 파여 있다. 지금이야 관광객들의 눈요기로 환영받고 있다지만 진지를 팔 당시의 제주 주민들의 고통이야 오죽하랴.
동굴뿐만 아니라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비행장까지 만들었고 격납고도 팠다니 그 고충을 이루 말할 수 없음을 오늘 이 길을 걷는 후손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송악산 중턱에 올라 좌측으로 돌아서니 해산물을 파는 음식점 두 곳이 영업 중이다. 시야가 확 터진 <남부 코지>라는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해물라면과 막걸리 한 병을 시켜놓고 풍경에 취했다. 눈이 흔들리고 가슴도 울렁거린다.
송악산 둘레는 나무로 길을 만들어 다니기엔 불편함이 없으나 산길의 운치는 덜하다. 산 정상부에는 말 두 필이 머리를 처박고 풀을 뜯고 있고, 길 아래 절벽에는 갈매기 한 마리가 날갯짓을 치고 있다. 행복한 올레의 풍경이다.
송악산은 오뚝한 산방산과는 대비되는 산이다. 산이 길고 작은 봉우리들이 많다. 그래서 별칭이 99봉이고, 해송으로 덮여있어 송악이고, 절벽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하도 높아서 <절울이오름>이다.
파도가 울면 얼마나 산이 아플까 싶다. 오름은 분화구가 두 곳이라 더욱 기묘하다는데 정상은 출입이 금지되어 오를 수 없었다.
올해 8월 1일부터 2020년 7월 31일까지 통제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어, 아쉽지만 다음 여행길에 오르기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산 정상이 아니라도 둘레만 걸어도 여한이 없다. 송악산 언덕을 폭풍의 언덕이라고도 한다는데, 언덕의 풍경은 폭풍처럼 가슴을 친다. 가슴을 치니 절경이다.
그곳에서 살고 싶은 송악산을 돌아서서 숲속 길을 조금 걸으니, 마라도 선착장 주차장이 다시 보이고 차도가 나온다. <송악 공원>을 한 바퀴 돈 셈이다. 차도를 건너면 동일오름과 섯알오름으로 이어지는 본래의 올레길을 걷게 되는데,
본래의 코스를 걸으면 일제가 만든 고사포 동굴기지, 알뜨르 비행장의 격납고도 만나고 제주 4.3사건의 현장인 섯알오름 위령탑에 참배도 하겠는데, 올레 리본도 없고 동행도 없으니 심약한 나는 시야가 트인 차도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차도를 걸어 나가니 <태평양의 징검다리 소공원>이 전망 좋은 해변에서 길손들을 기다린다. 미국 환태평양공원재단과 세계평화의 섬 <범도민 실천협의회> 등이 세계평화를 위하여 2010년 8월에 준공하였다고 새겨 놓았다.
세계평화는 누구나 염원하는 희망 사항이긴 하다만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한데, 무슨 노력이 필요할까? 미약하나마 나는 올레를 걸으면서 평화를 생각하고 평화를 노래해 보련다. 평화에는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92)-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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