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금혼식 소고>

잡문

by 웅석봉1 2025. 1. 2. 13:47

본문

 

금혼식(金婚式, Golden Wedding)에 즈음한 소고(小考)

 

주지(周知)하시다시피 결혼(結婚) 50주년이 되는 기념일(記念日)을 금혼식이라 한다. 이런 전통(傳統)은 고대(古代) 로마(Roman) 시대(時代) 또는 중세(中世) 시대, 심지어는 19세기 영국(英國)에서 시작되었다는 설() 등으로 다양(多樣)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50년 동안, 아들딸 낳아 잘 키워서 서로 무사히 살아왔으니 자축(自祝)하는 의미에서 부부(夫婦)가 금()으로 된 물건(物件)을 만들어 선물(膳物)로 주고받거나, 부부가 함께 여행을 떠나는 등이 현() 세태(世態)이다.

 

이와 유사(有事)한 개념(槪念)으로는 금강혼식(金剛婚式), 회혼식(回婚式), 은혼식(銀婚式) 등이 있다. 금강혼식은 결혼 75주년을, 회혼식은 60주년(週年), 은혼식은 25주년을 기념(紀念)하는 날이다. 물론 우리 부부는 은혼식은 하지 않았지만, 금강혼식은 꿈도 꿀 수가 없을 것 같고, 결혼 60주년까지 산다면 회혼식만큼은 아주 멋지게 할 예정이다. 하하.

 

그런데, 매년 1225일은 크리스마스(Christmas) 또는 성탄절(聖誕節)이라 한다. 기독교의 명절(The Christian Holiday)로서 예수의 탄생(The Birth of Christ)을 기리는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가 합쳐진 합성어며, 현재는 종교적(宗敎的) 의미를 넘어 세계적(世界的)인 문화(文化) 행사(行事)로 발전(發展)하였다.

 

그런 성탄절이 우리 부부에게도 큰 의미(意味) 있는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4년에 우리는 부산 서면(西面)의 한 예식장(禮式場)에서 고교 시절 은사님(恩師拰)을 주례(主禮), 일가친척(一家親戚)과 선배(先輩) 동료(同僚) 직원(職員)들을 모시고 거창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가 나는 군() 복무(服務, 防衛兵, 1969부터 1994까지 존재했던 병역제도) ()이었고, 아내는 부산에서 모() 병원에 간호원(看護員)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듬해 여름에 군에서 제대(除隊)하고, 입대 시()에 근무하던 직장인 농협은행(農協銀行) 울주군지부(蔚州郡地部, 당시 명칭은 울주군 농업협동조합)에 복직(復職)하였다.

 

그 후 우리는 울산에서 신접(新接)살림을 차렸다. 삭월 세()의 단칸방부터 시작하였다. 팍팍한 월급(月給)에 생활이 넉넉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저축(貯蓄)하면서 어려운 인생(人生)을 살아왔다. 반성하자면 그 시절 일에 지치고 술에 치어서 가정(家庭)을 소홀히 한 점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자성(自省)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나에게 의미 있는 세 도시(都市)를 말하라면, 산청(山淸)과 부산(釜山) 그리고 서울(Seoul)이다. 산청은 내가 태어나서 초등(初等)과 중등(中等)을 다닌 고향(故鄕)이고,

 

부산은 고등(高等)을 다니고, 아내와 결혼한 곳이자 이후 12년간 직장 생활을 한 곳이며, 부동산공인중개사(不動産公認仲介士)라는 국가자격증을 취득한 곳이고, 서울은 14년 동안 생활하면서, 석박사(碩博士)는 아니지만 두 개의 학위(學位, 부동산학사와 문학사)를 받았고, 화려하게 직장(職場)에서 은퇴(隱退)한 곳이다.

 

그 외 다른 도시로는 울산(蔚山), 창원(昌原). 마산(馬山). 진주(晉州). 시흥(始興). 성남(城南) 등이 근무한 지역이다. 정리하자면, 경남(慶南). 부산(釜山). 울산(蔚山). 경기(京畿). 서울까지 5개 광역시(光域市)에 시, 군을 따지면 무려 13곳을 다녔으며, 게다가 이사(移徙)한 곳을 계산해 보니 30여 곳이나 넘었다. ~~~이사를,……,다녀도 많이도 다녔다.

 

그러니 때마다 이삿짐을 꾸린 어부인(이후 나는 아내를 어부인이라 부른다. 어부인은 어렵고 까칠한 또는 어질어빠진 부인의 준말이다)이 얼마나 고생(苦生)이 많았을까. 이 자리를 빌려 위로(慰勞)를 전한다.

 

그동안 우리 부부는 울산 우정동(牛井洞)에서는 아들을 얻었고, 부산, 화명동(華明洞)에서는 딸을 얻었다. 결국 11녀의 자녀를 둔 셈이다. 이는 산아제한(産兒制限)이라는 당시의 국가 시책(施策)에 부응(副應)한 일이었다. 요즘 우리는 세종(世宗)과 산청(山淸)을 오가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참고로 신부 아버지께서는 해방 이후에 경찰(警察)에 투신(投身)하여 경남(慶南) 도경(道警)에 근무하시면서 6.25사변 때 함안(咸安) 전투에 참전(參戰)하셨다. 그러다가 참전 후유증(後遺症)에 병(, 장티푸스)까지 얻어 195011월 말에 돌아가시니, 신부 어머니께서는 남편의 근무처 근방인 부산, 대신동(大新洞)에 사시다가 가족들(아들 3, 2)을 이끌고 고향인 산청(山淸)으로 이주(移住)하셨고,

 

신랑 아버지는 6.25사변 때 북한군(北韓軍)의 총탄(銃彈)을 맞고, 군병원(軍病院)에 입원(入院) 치료(治療)를 받으셨으며, 어머니께서는 산청에서 나고 자라면서 농사(農事)를 지어 셨다.

 

신랑, 신부는 산청의 명문(名門?) 명륜중학교(明倫中學校) 동기동창(同期同窓)이며, 두 사람 모두 두뇌(頭腦)가 명석(明晳?)하여 장학생(獎學生)으로 선발되어 입학(入學), 졸업(卒業)하였다.

 

신랑(新郞)4(), 4()의 장남(長男)으로 결혼할 때 아버지()께서는 부산의 모 종합 병원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하고 계셨고, 신부(新婦)3(), 2()의 막내로 아버지께서는 경찰 간부(幹部, 경위)였는데, 애석(哀惜)하게 돌아가셨다. 흑흑

 

이후 신부 어머니께서는 자궁암(子宮癌)으로 2003년도에 별세(別世)하셨으며, 신랑 아버지께서도 2007년에 담도암(膽道癌)으로 별세하시고 대전 현충원에 영면하고 계신다. 한편, 신랑의 둘째 남동생도 2014년에 교통사고(交通事故)로 안타깝게 사망하였고, 흑흑, 나머지 7형제들과 신부의 5형제들은 모두 건강하게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리고 부부의 아들은 2003년에 부산(釜山)에서 멋진 처녀(處女), 딸은 2019428일에 대구(大邱)에서 미남자(美男子)를 만나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 아들 부부는 두 아들과 미국(美國)에서, 딸 부부도 제주(濟州)에서 역시 두 아들과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20241225일 늦은 밤에 작성함. ().

 

 

 

 

'잡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병장수 10계명>  (3) 2025.01.01
<경기도 살이> 50  (1) 2024.08.10
<경기도 살이> 49  (2) 2024.08.09
<경기도 살이> 48  (3) 2024.08.08
<경기도 살이> 47  (1) 2024.08.07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