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 19일에 치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노무현은 총 유효 투표의 48.9%인 1,200만여 표를 얻어, 1,143만여 표(46.6%)를 득표한 한나라당 후보 이희창을 57만여 표(2.3%)차로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일부 언론은 이 선거 결과에 대해 ‘세대 전쟁’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는 과장된 면이 있었다. MBC-코리아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투표율은 47.5%, 30대의 투표율은 68.9%에 지나지 않은 데다, 20대와 30대의 34%가 이희창에게 표를 던졌으며, 50대의 40%, 60대의 34%가 노무현에게 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노무현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이 20대와 30대에 더 많고 이희창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이 50대와 60대가 더 많은 이유도 그들의 매체 이용 행태의 차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당시 20대의 인터넷 이용률은 86%인데 반면에, 50대 이상의 인터넷 이용률은 9%에 지나지 않았다. 대선에 관한 정보를 얻는 데 2030이 주로 의존하는 인터넷과 5060이 주로 의존하는, 이른바 조중동(『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사이엔 큰 시각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매체 의존의 차이가 노무현 집권 후 큰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손석희는 2003년 『문화일보』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그의 칼럼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손석희가 ‘신문 저널리스트’로 서도 대단한 역량을 갖고 있다는 걸 감지했을 것이다.
국문학도 출신이라서 그런지 글도 잘 쓰지만, 알맹이가 날카로웠다. 예컨대, 그는 8월에 쓴 「언론개혁과 대통령의 말」이라는 칼럼에서 노무현과 언론의 갈등에 대해 일단 노무현의 ‘억울함’을 수긍한 뒤에 다음과 같은 명쾌한 ‘교통 정리’를 했다.
“그러나 이젠 노 대통령도 그 억울함의 말을 줄일 때도 되었다. 그는 언론과의 대결을 ‘오기(傲氣)가 아닌 가치 충돌의 문제’라고 했지만, 그가 말을 하면 할수록 오기 때문이라는 인식은 더욱 확대될 뿐이다. 특히 노 대통령이 근본적인 언론개혁보다는 자신과 측근이 관련된 사안이 불거졌을 때 더욱 언론에 대한 불만을 표시해 왔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은 한 그러한 인상은 피할 길이 없다. 무엇보다도 노 대통령이 전면에 나설수록 언론 문제에 있어서 시민사회의 역할은 실종된다. 대통령이 나서는 한 시민사회의 언론개혁 운동은 본의 아니게 관제 운동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강준만의 『손석희 현상』 <인물과사상사> 47쪽, 48쪽 인용.
★각설하고, 지금 생각하면 성남에서의 3년은 너무도 행복했다. 성남시는 중국의 선양(심양)시와 자매결연 도시다. 나는 성남 기관장 모임의 총무로서 해외 연수단의 일원으로 언제나 동행하였다. 매년 선양을 방문하여 중국인들과 우의를 다졌다. 지금은 모두 과거의 사람들이 되었지만.……
2005년도에는 선양에서 1박하고 장백폭포를 올라서 백두산 천지에 이르니 천지가 온통 백색의 얼음판이었다. 얼음도 보통 얼음이 아니라 사람이 들어가도 깨지지 않는 두꺼운 얼음이다.
일행은 얼음 위에서 걷고 뛰면서 기념 촬영도 하였다. 그날은 다행히 날씨도 너무 화창하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우리를 내려다보는 모습, 역시 황홀하였다.
5월의 백두산은 표현키 어려울 정도로 고독한 모습이었으며, 특히 천지 주변에 핀 붉은 들꽃들과 호수 위의 백색 얼음은 가히 절경이었다. 하루속히 남북통일이 되어서 한국에서 바로 백두산으로 오르는 날을 기대한다.
2006년도에는 만리장성에 서서 장성을 쌓을 당시를 그려 보았다.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만리장성,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지만, 물론 과장된 표현이지만,……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느꼈다. 만리장성은 수십 년이 필요한 대역사다.
그리고 성남시 체육회 행사에도 많이 참석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체육 행사는 시도 때도 없었다. 전국체전. 도민체전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격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조기축구회 등 소소한 지역체육행사도 많았다.
부임하기 전부터 농협 지부장은 성남시 체육회의 이사로 되어 있었다. 체육 행사에는 비용이 많이 든다. 주로 선수들의 식대와 움직이는 차비가 대부분이지만, 그래서인지 농협 지부장에게 감투를 씌워서 찬조금을 부담(?)시키자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체육회를 마치면 관련 단체장에게 감사패가 주어진다. 부임 첫해에는 체육회 이사로 활동하다가 이듬해에는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모두가 성남에 근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남시지부를 떠나면서 같이 근무한 직원들이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이름은 <열성회>, ‘열심히 일하고 성남을 사랑하는 당신들’이라는 뜻이다. 내가 은퇴한 지 십오 년이 지나니 거의 퇴직하고, 지금은 현직으로 세 분이 근무 중이다. 지금도 우리는 최소한 분기에 한 번 정도는 만나고 있다.
이듬해(2007년) 1월에, 나는 본부를 떠난 지 실로 오랜만에 입성할 수 있었다. 정년을 2년 앞둔 시기다. 후임으로 역시 경남 출신인 전흘수 지부장에 인계하고, 나는 감사실장으로 부임했다. 성남시장이 경남 출신이니 지부장도 경남 출신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전임인 양승진 감사실장은 정년 퇴임하고 자회사 간부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부장급으로 승진한 지 6년 만에 본부로 올라왔다. 당시는 본부에서 승진한 사람들은 늦어도 3, 4년이면 거의 복귀하는데 내가 가장 늦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운명인지 모르지만, 내 성격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천성이 언제나 문제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달성해야 할 목표도 중요하지만, 정의가 아니면 가지를 말아야 한다.
그런데 정의는 고사하고 편법이나, 심지어 불법을 써서라도 출세부터 하고 보자는 사람들은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사실 일개 농협 시군 지부장의 일상을 이렇게 장황하게 올리는 것은 무의미할지 모르겠으나, 한 인간의 역사를 쓴다는 심정으로 정리해 본 것이다. 성남에서의 3년은 짜릿하고 아름답고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들이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 그동안 보잘것없는 이 글을 읽어 주신 구독자님들께 감사드린다. end –50)-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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