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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살이>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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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석봉1 2024. 8. 8.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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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말 전두환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걸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바로 19861030일 정부 발표에서 시작된 <평화의 댐> 사건이었다.

 

북한이 건설한다는 금강산댐은 정부 발표와 언론의 부풀리기 보도로 순식간에 남한 사회에 공포를 몰고 왔다. 언론과 일부 지식인이 5공에 대한 충성 경쟁에 돌입하면서 공포는 더욱 증폭되었다.

 

언론은 “2백억 톤의 물이 서울을 덮친다. 63빌딩의 절반 가까이 물에 잠기고”, “남산 기슭까지 물바다, 원폭 투하 이상의 피해”, “수도권까지 물바다, 잠실 올림픽 시설은 물론이고 한강 변 아파트군은 완전히 물속에 잠겨운운하는 보도를 해댔다.

 

북한이 왜 그런 짓을? 5공이 제시한 답은 서울올림픽이었다. 북한은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하여 그런 짓을 하고도 남는다는 것이었다. 신문, 방송할 것 없이 모두 미쳐 돌아갔다.

 

당시 상황에 대해 손석희는 나는 지금도 내가 뉴스를 진행하던 그때, 스튜디오 한쪽에 잉크를 풀어 놓은(그래야 더 실감이 났으므로), 수돗물로 찰랑대던 여의도 일대의 모형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당연히 거기엔 63빌딩이 있었고 파란 잉크 물은 그 빌딩의 허리께까지 차올라 넘실대고 있었다. 그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아니 장난처럼 하면 안 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63빌딩의 중간까지 물이 찬다는 건 좀 너무하지 않느냐, 2층 정도까지로 줄이자 어쩌자 하면서 제멋대로들 기준을 정하다가 누군가 <겁을 주려면 확실하게 줘야지>하는 말에 훅훅거리며 웃기까지 하였다. 그 광란의 시기에 과학적 사고는 오히려 장애물이었다. 우리가 내뱉은 웃음에는 무기력한 자조도 섞여 있었겠지만, 그 한구석엔 또 어떤 광기도 있었던 게 아닐까, 거짓말도 계속하면 그 자신은 참말로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는 그때 이미 자기 제어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그랬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대규모 규탄 대회들이 열렸다. 규탄만 한다고 되는가? 대안이 필요했다. 언론이 앞장서서 조작한 공포는 <평화의 댐>이라는 대안(?) 모색으로 나타났고 언론은 126일부터 그 댐을 건설하기 위한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어린아이, 해외 동포, 심지어 교도소 재소자들에게까지 성금을 거둬들였다. -중략- 그리하여 6개월여 만에 700억 원이 넘는 엄청난 돈을 모았지만, 19936월 감사원이 전면 특감에 들어가면서 평화의 댐은 완전히 조작된 정보에 따라 꾸며진 허구임이 드러났다.

 

5공 정권의 엉터리 <금강산댐>을 들고나온 배경엔 1986년 대통령 직선제 요구로 뜨겁던 개헌 정국을 돌리기 위한 정략적 목적이었던 것이다. 강준만의 손석희 현상<인물과사상사> 38~39쪽 인용.

 

그때 나는 광복동 농협 부산지시회 4층에서 채권관리 담당 대리로 근무하면서 깜박 속았었다. 하도 분하고 억울하여 북한을 성토하였고, 격분하여 성금을 낸 것으로 기억한다.

 

1987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이룬 대한민국은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키고, 곧이어 3당 합당으로 여소야대 정국을 여대야소로 바꾸었다.

 

3당 합당 때 나는 아무리 그래도 5공 세력과 합당한다? ‘이건 아니올시다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퇴근 후에는 대폿집에서 막소주를 들이키며 울분을 토했다.

 

이후 1992년 선거에서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어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라 명명하고 공직자 재산공개,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등 개혁 정책을 펼쳐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고 그건 잘한 일이었다.

 

각설하고, 2007, 정초에 이봉주 감사위원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감사실로 발령이 날 예정인데 만나자는 연락이었다. 나는 당일 본부로 들어가서 그분을 뵈옵고, 우리 농협이 처한 여러 가지 현안을 협의하였다.

 

다음날로 본부 감사실로 발령이 났고, 성남시지부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봉주 감사위원장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분은 내가 만난 수많은 사람 중에 아주 특별하고도 훌륭한 분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분과의 인연은 이어지고 있다.

 

성남시지부를 떠난 200716일 자에 <정든 성남을 떠나면서>라는 글을 내부 통신망(이메일)으로 사랑하는 직원들에게 보냈다.

 

이어서 2007112일 저녁에 성남시지부 가족들이 성대한 송별연을 마련해주셨다. 이날 시지부 간부 직원들은 물론이고 회원 조합장과 농민단체 대표들이 참석해 주셨다.

 

특히, 그 자리에서 농민단체 대표가 나에게 감사패를 주었다. 농민단체에서 감사패를 받기는 산청지부장 시절에 처음이고, 이번이 두 번째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농협인(農協人)으로서는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그동안의 내 행적 순간순간들을 묵직한 사진첩으로 만들어 이대호 차장이 직원대표로 나에게 주었다. 나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무소를 전전하였지만 성남만큼 정이 든 곳도 없었다.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end 48)-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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