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1년을 365.25일로 정한 ‘율리우스력’을 제정하고 국립도서관과 극장을 만들었으며, 성벽을 허물어 도시를 확장하고 영토를 18개의 속주로 재편해 총독을 새로 파견했다.
그라쿠스 형제가 살해당하면서 좌초했던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곡물에 대한 국가 구매제도를 도입했으며 자격이 있는 속주 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원로원의 계엄령 발동 권한을 폐지하고 시민 배심원단을 도입하는 사법개혁 조치를 했으며, 교사와 의사를 우대하고 군인의 봉급을 크게 올렸다.
카이사르는 2년 후 종신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가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지만, 로마의 공화정은 사실상 이때 막을 내렸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자신감이 지나쳤던 나머지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서도 정적을 숙청하지 않았고, 그 관대함 때문에 암살의 비극을 불러들였다.
암살 음모와 실행의 주역이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에게 개인적인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카이사르는 한때 사랑했던 여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브루투스가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한 것까지 다 용서하고 아들처럼 대해주었다. 그런데도 그가 카이사르를 죽인 것은 공화정을 폐기하고 제정으로 가려 한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전우였던 다른 장군들도 같은 동기로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 그런데 로마는 이미 과거의 공화정 체제로 운영하기엔 너무 큰 제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카이사르를 죽여도 공화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걸 그들은 몰랐다.
공화파는 암살에 성공했지만, 카이사르를 지지했던 로마 시민들의 분노를 감당하지는 못했다. 내전으로 치달았던 로마의 정세는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내전을 평정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됨으로써 안정을 찾았다.
공화정을 공식 폐지한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할 목적으로 카이사르를 신격화했고, 후임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했다. 로마 황제들은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대물림하면서 청년 카이사르의 조각상을 도시 곳곳에 세웠는데, 이 전통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할 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주)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일명 아우구스투스, BC63~AD14)는 카이사르의 양자이며 후계자로 초대 황제가 되었다. 테오도시우스(347~395) 황제는 제50대 황제였다.
유시민의 『유럽 도시 기행 1』 (주, 도서 출판. 아름다운 사람들) 121~122쪽에서 인용.
*각설하고 오늘도 올레길을 걸어보자
▲법당을 나와서 주변을 잠깐 걸으니 나무 껍데기가 붙어있는 거친 소나무 <판때기>에 새긴 글귀들이 길섶으로 여럿 보인다. 하나같이 발길을 멈추게 하고, 마음을 움켜 조우는 글귀들이다. 그중에 하나를 소개하면,
*나는 왔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 채/ 나는 살고 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체/ 나는 죽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래서 종교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또 이렇게 걷는지도 모르겠다.……,
약천사를 벗어난 길은 <해신>이라는 해물 짬뽕집도, <제주 흑돼지와 전복>이라는 한식당도, <해송>이라는 횟집도 지나, 시원한 도로를 타고 해변으로 향한다. 해변의 언덕엔 검은 돌무더기, <대포연대>가 있을 자리가 그 자리 인양 포구를 지키고 서있는데, 연대 아래 해안에는 먼지 한 점 없는 깨끗한 바위와 조약돌들이 쉼 없이 밀려오는 물결을 받아들인다.
해안을 돌아 나서니 제주의 명소 중문관광단지 속으로 들어선다. 단지는 중문동, 대포동, 색달동 일대 97만 평에 조성된 종합 관광단지다. 1971년에 관광지구로 지정되어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2001년에야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하니 30년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은 제주도의 필수 관광코스가 되었다.
오른쪽으로 제주국제컨벤션센터 건물을 바라보며 포근한 길을 걸으니 길은 이내 <대포 주상절리대> 방문객센터에 다다른다. 길이 1 Km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주상절리(柱狀節理)로 내려가려면 입장료를 내어야 하는데 매표소 앞에는 관광객들이 줄지어 있어, 나는 시간 관계상 그대로 패스했다. 일행도 나를 따라서 패스한다.
소란한 광장을 조금 벗어나니 올레 간세가 조그만 돌담 앞에서 앞으로 가라고 몸짓한다. 따라 들어가니 <SEAES 호텔> 정원이다. 정원엔 운치 있는 초가지붕에 유리 창문으로 단장한 건물들이 주변의 나무들과 잘 어울린다. 전통과 현대의 어울림이 돋보이는 정원이다.
여기서 좀 살아보고 싶은 충동이 생길 정도다. 잘 가꾼 정원에는 관광객의 카메라 여럿이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호텔 정원을 나서니 조그만 오름 입구가 기다린다. 직선으로 오르는 긴 나무 계단이 위엄 있게 내려다본다. 표시판을 보니 <베릿내오름>, <베릿내>는 천제연의 깊은 골짜기 사이를 은하수처럼 흐른다고 해서, 별이 내린 내, 별빛이 비치는 개울이란 뜻이라고 한다.
오름의 전망은 언제나 황홀하다. 그래서 여기 중문단지가 빛나고 있음이다. 천제연폭포 아래 나무 계단으로 이어지는 길은 <칠 선녀길>이란 이름만큼이나 빛이 내리고 숲이 깊다.
오름을 내려오는데 젊은 중국인 관광객 부부가 천제연폭포 가는 티켓을 들고 길을 묻는다. 나도 잘 몰라 망설이는데 마침 중늙은이 한 분이 다가와 그들을 안내한다. 아마도 산책을 나온 주민인 모양인데, 그들은 고마워하며 같이 걷는다. 타국을 여행하다 보면 이런 일들을 가끔 겪는다. 그런 경험이 있던 나도 고마웠다.
천제연폭포에서 흐른 맑은 물은 <성천포구>를 거쳐 바다로 흐른다. <베릿내>를 건너선 길은 바로 해변의 관광센터 퍼시픽랜드 광장에 들어선다. 광장의 야외의자에서 우리 일행은 목이 말라서, 막걸리 한 통을 사서 같이 마셨다. 돈은 내가 계산했다. 마신 막걸리는 부드럽고 시원하고, 보는 풍경은 붉었다.
여기서 올레는 두 갈래로 갈린다. 해변으로 가는 A 코스와 산길로 가는 B 코스로, 우리는 해변 길을 택했다. 해변 초입에 들어서니 작고 검은 비석 하나가 단아하다. 2012년 10월, 이곳에서 우리나라 서핑계(界)를 이끈 47세의 유망 서퍼 한 사람이 그가 좋아한 바다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인이 생전에 가장 사랑하는 바다에 영원히 잠들었다.*
비석의 마지막 문장이다. 죽음은 슬프지만 후인들의 정성은 고맙게 다가온다. 그의 명복을 밀면서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86)-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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