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오는 로마 정치체제 변화의 결과이며 상징이었다. 공화정 시대에 시민들은 포로로마노에서 정치인들의 격정적인 연설을 들으며 자신을 대표할 공직자를 선출하고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민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제정 시대에는 모든 것을 황제와 소수의 권력자에게 맡겨둔 채, 콜로세오의 잔혹한 검투(劍鬪)를 보며 미친 듯이 소리 지르다가 패배한 검투사에게 자비를 베풀 것인지, 여부를 두고 엄지손가락을 올리거나 내리는 관객으로 살았다. 정치체제의 변화가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만든 것이다.
콜로세오 외벽이 절반 넘게 부서진 것이 외부 침략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대한 돌과 흙벽돌로 지은 콜로세오를 파괴하려면 건설하는 데 투입한 것과 맞먹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19세기 중반 알프레드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기 전까지는 콜로세오 외벽을 허물 정도로 강력한 물리적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검투 경기를 폐지한 후 비어 있던 콜로세오는 로마제국 말기에 지진으로 크게 흔들렸다. 귀족들은 떨어져 나온 돌을 가져다 집을 짓거나 도로를 만드는 데 썼다.
하지만 그 정도로 콜로세오 외벽이 지금처럼 훼손되지는 않았다. 콜로세오 외벽을 부순 주역은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군인들이었다. 19세기 초 로마를 점령한 그들은 로마인들이 석재를 연결하기 위해 썼던 납을 수거해 총알을 만들려고 외벽을 마구 허물었다.
유시민의 『유럽 도시 기행 1』 (주, 도서 출판. 아름다운 사람들) 110~111쪽에서 인용.
*각설하고 오늘도 올레길을 걸어보자.
▲그런 해변을 뒤로하고 길을 걸으니 안내판 하나가 길을 멈추게 한다. 백년도 전에 건너편 본도 종말에 김 씨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는 목소리가 높고 쟁쟁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런 그가 풍랑을 만나 우도에 머물면서 저 건너편 종말의 자기 밭을 보니, 종놈 <득셍이>가 밭은 갈지 않고 졸고 있길래 이를 본 김 씨가 종놈을 깨우려고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는 <득셍이 코지>,
아하 그렇구나. 종말이란 동네와 우도가 그렇게 가깝구나, 김 씨란 사람은 목소리만 큰 줄 알았는데 눈도 밝구나,……
아무리 절색인 꽃도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찮은 잎이듯이, 이렇게 해변에 <스토리>를 만드니 멋진 곳이 탄생하는구나, 머슴의 처지인 <득셍이>에게는 얄미운 주인이지만 그래도 그 시절엔 낭만이 있었겠구나.
스토리가 만든 <득셍이 코지>를 지나 들길로 들어서니 말 위에서 우쭐대는 관광객이 줄을 잇고, 자전거와 스쿠터를 타는 사람들도 길을 메운다. 가는 곳마다 사람이다. 그래서 우도는 오늘도 외롭지 않아서 좋다.
이어지는 길은 <하우목동항>을 지난다. 하우목동항도 천진항처럼 여객선이 왕래하는 항구다. 항에는 여객선 한 척이 잠시 정박 중이다. 분주함 속의 고요함도 좋은 풍경이다.
가는 길에 <산물통>이라는 우물이 옛 모습 그대로다. 2010년에 상수도가 들어올 때까지 이런 우물을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길은 주흥동 사거리를 지나 마을 길과 들길로 이어진다. 길 위의 검은 돌담, 흑룡만리(黑龍萬里)가 있어 밭과 집이 더욱 귀해 보인다. 집 안, 밖으로 우뭇가사리 말림이 한창이다. 가가호호(家家戶戶) 검은 해초를 말리고 있는 풍경은 농촌의 가을 풍경과 흡사하다.
들길 속 언덕빼기에 작은 정자가 있어 쉬어갈까, 하는데 앞서가던 청춘남녀 한 무리가 냉큼 차지하여 배낭을 풀고 있다. 우리는 시장기가 돌았지만 참고 가자고 마음먹고 걸으니 <파평윤씨 공원>이라는 표석을 세운 작은 공간이 딱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나그네를 반긴다.
공원 속에는 검은 비석 십 수기, 아직 공간의 일 할도 차지 않아 보인다. 나는 제주의 이런 장례문화를 권장한다. 얼마나 가족적이고 효율적인가. 청명 한식이나 설 추석 명절에 집안 대소 가족들이 다 모여 한바탕 축제를 벌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 모습에서 제주의 <권당 문화>을 느낀다.
제주에서 정치 시즌이 되면 이 당 저 당 말해도 <권당>이 최고라는 말이 있고, 이런 의식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따져보면 <권당>은 친인척이니, 말하자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이치이니, 이 만고의 진리를 누가 나무라겠는가.
썩은 피가 있다면 당연히 씻어 내고 도려내어야 하겠지만 그런 것쯤은 누구나 아는 세상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형제간끼리 치고받는 일부 인사들의 막장 드라마와는 비길 수 없는 미덕이리라.
닮고 싶은 공원묘지를 뒤로하고 길을 걸으며 검은 돌담 안의 파밭을 들여다보니 쪽파가 모두 말라버렸다. 비가 너무 잦아 파 뿌리가 상했나 보다. 많아도 적정, 적어도 걱정인 것이 물이니 안타까운 마음 어이하리.
낙오된 쪽파 밭길을 내려서니 작은 포구 하나가 우리를 기다린다. <하고수동 포구>, 포구에는 또 팔각정자가 있는데 다행히 그곳에는 선임자들이 없었다. 정자에 들어서니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씻어 준다. 이 땡볕의 고마운 정자에서 우리는 배낭을 풀었다. 준비한 간식으로 시장기를 달래니 마음마저 가득하다.
이어지는 길섶에는 1995년 8월 26일, 제주 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된 방사탑 한 기가 아담스럽게 서 있다. 방사탑은 육지의 솟대나 장승과 같이 액운을 막기 위해 세운 돌탑이다. 우도에 이런 방사탑이 13기가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속치마 휘날리는 <마릴린 먼로>를 입간판으로 세운 카페에, 해골가면을 간판에 붙인 해적 식당에, 노랑머리 파란 눈의 이방인들도 제법 활보하니, 태평양의 관문에 어울리게 참으로 국제적이다. 포구는 해수욕장으로 이어지고, 좁은 해안도로는 사람과 자전거와 스쿠터와 차로 만원이다. -78)-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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