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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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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석봉1 2024. 11. 10.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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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오는 경기장이 아니라 공연장이었다. 여기서는 사람이 짐승과 싸웠고 검투사들끼리 피가 튀는 대결을 벌였으며, 점심 휴식 시간에는 죄수를 맹수에게 던져주는 이벤트도 했다. 이런 것은 경기가 아니라 공연이라고 하는 게 맞다.

 

콜로세오는 또한 극장이었다. 해전 장면을 연출할 때는 공연장 바닥의 십자 모양 연못에 물을 채워 수상 무대를 만들었다. 검투사와 맹수, 배우들이 등장하는 순간이 더 극적으로 보이도록 객석 아래 지하에 대기실과 통로를 설치했다. 지금도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어서 지하에서 3층 객석까지 건물의 구조가 상세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공연장에서 기독교도를 맹수의 먹이고 던졌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로마제국이 기독교도를 참혹하게 박해한 것은 맞다. 점심 휴식 시간 이벤트로 맹수에게 던져진 죄수 중 일부가 기독교도였을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이유로 사람을 죽인 처형장은 따로 있었다.

 

유시민의 유럽 도시 기행 1(, 도서 출판. 아름다운 사람들) 106~107쪽에서 인용.

 

*각설하고 올레길을 걸어보자.

 

삼매봉(三梅峰) 정상에 서니 온 세상이 시원하다. 절경(絶景)이다. 정상에는 <남성대>라는 작은 막돌 하나가 초연하고, 막돌 가까이 팔각정 하나가 우뚝하여 쳐다보니 이름하여 <남성정(南星亭)>인데 고고(孤高)하다.

 

<남성정>은 남극노인성이라는 별을 보는 정자란 뜻이고, 매화 세 송이가 곱게 솟은 서귀포 제일 경이라 하는데 여기 올라, 노인성(老人星) 전설을 생각하니, 내 마음도 급해진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귀한 그 별, 예로부터 여기서 본다, 했거늘, 나도 그 시인처럼 <남성정>에 올라 불로장생을 빌었다.

 

정자 처마 높은 곳에 제주 시조 문학회장을 역임한 화촌 고응삼(1931~2016) 시인이 쓴 시 한 수가 걸려있는데 언젠가 삼매봉이 생각날 때 다시 보고자 그 전문을 옮기니 노래처럼 읽힌다.

 

이름 높은 삼매봉은/ 매화송이 피어난 듯/ 서귀포 제일경을/ 자랑하는 선경이다// 옛 전설 간직하되/ 불로장생 누리고자/ 남극 노인성은/ 예서 본다 했거늘/ 옛님 놀던 자취에/ 일컬어 남성대라// 산수 맑은 한라 기슭/ 창파 삼도 초록바다/ 외돌괴 신선바위/ 우두암 기암절경/ 그림 같은 남극정서/ 서귀포 칠십리에/ 어어도 노래하듯/ 남주 해금강이/ 이 아니 좋을손가.

 

전설을 품고 여행에서 돌아와 살펴보니 전설의 역사가 살아 있었다. 지난 320일 밤 7시에 서귀포 이중섭 공원에서 제5회 서귀포 봄맞이 축제란 부제가 붙은 <남극 노인성제>가 성대히 열렸다고 하니, 남극성의 전설은 지금도 문화행사로 이어지고 있었다.

 

<제주 매일> 신문 기사(2014.10.8.)를 인용하니 다음과 같다.

 

-겨울철 별자리 중 가장 밝은 별인 시리우스를 따라 아래로 보면 수평선 위에 두 번째로 밝은 별이 바로 남극노인성이다. 옛사람들은 노인성(canopus)을 목숨별이라 부르며 한 번이라도 보면 무병장수(無病長壽)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라산과 <서귀진>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삼매봉 정상 어딘가에 별자리 관측소라도 만들어 등불을 밝힌다면 뉘라서 못 볼 소냐, 우리는 정상에서 몸과 마음을 풀고 넘어질세라 서귀포 <제일경>을 살금살금 내려왔다. 해거름의 외돌개휴게소는 한가로웠다. 주차장 화장실에서 땀을 씻고는, 때맞게 다가온 택시에 몸을 싣고 서귀포 시내로 향했다.

 

택시는 서귀포 매일올레시장 앞에서 멈추었다. 시장은 정갈하고, 시장 안길을 흐르는 작은 물길은 이외로 맑았고, 그 물길 따라 노니는 금붕어들은 빛났고, 먹을거리들은 먹음직스러웠다. 게다가 특이한 점은 시장 주변의 도로에는 신호등도 없었다. 차들은 다음이고 언제나 사람이 먼저였다. 마치 캐나다 토론토처럼.

 

우리는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면서 아이스 쇼핑을 즐기고 간식거리 한 비닐을 사 들고 노을이 가득한 이중섭거리로 들어섰다.

 

예술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거리다. 맵시가 인사동 어디쯤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다. 길 주변의 풍경은 물론이고 길바닥 돌까지도,…… 거리의 중심에 이중섭 미술관과 그가 피난 시절 1년을 살았던 초가가 복원되어 있었다.

 

미술관은 관람 시간이 지나 초가와 미술관을 잇는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쓸쓸하고 가난한 화가의 잔영이 그의 가족과 함께 살았던 2평도 안 되는 방안을 아직도 감돌고 있었다. 공원 가장자리에는 화가의 작은 동상이 있어 그와 다정하게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

 

낙상(落傷)으로 불편한 어부인을 위로하며 예약한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이중섭 거리와 인접해 있었다. 걷고 보니 6코스는 명성에 손색이 없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소문도 소문 나름이었다. 걷고 보니 올레길 6코스는 참으로 멋진 길이었다. -76)-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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