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채식주의자』(창비, 2007년)에서 <작가의 말>을 소개한다.
*10년 전의 이른 봄, 「내 여자의 열매」라는 단편 소설을 썼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고, 함께 살던 남자는 그녀를 화분에 심는 이야기였다. 언젠가 그 변주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
10년 전의 내가 짐작했던 것과 퍽 다른 모습이 되었지만, 이 연작소설이 출발한 것은 그곳에서였다. 2002년 겨울부터 2005년 여름까지 이 세 편의 중편소설을 썼다.
따로 있을 때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합해지면 그중 어느 것도 아닌 다른 이야기-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담기는 장편소설이다. 이제 제자리에 차례를 맞추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길었던 매듭이 지어지는 느낌이다.
-중략-
어리석고 캄캄했던 어느날에, 버스를 기다리다 무심코 가로수 밑동에 손을 짚은 적이 있다. 축축한 나무껍질의 감촉이 차가운 불처럼 손바닥을 태웠다. 가슴이 얼음처럼, 수없는 금을 그으며 갈라졌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이 만났다는 것을, 이제 손을 떼고 더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도 그 순간 부인할 길이 없었다.
이젠 여학생이 아닐 Y에게,
병원을 취재할 수 있게 해준 분들께,
비디오 작업의 세부를 가르쳐준 분들께
도움을 베풀어준 분들,
굳건히 지켜보아준 이들께
창비 편집부의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007년 가을 韓 江
**이 소설은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였다.
***각설하고 오늘도 우리는 올레길을 걷는다.
▲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15코스(한림~ 고내 올레)
어젯밤은 제주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의 모텔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숙박업소 두 군데를 돌아 세 번째에서 겨우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은 방을 구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노숙자가 될 뻔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상악화로 갑자기 공항이 폐쇄되었으니, 비행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가까운 이곳에 숙소를 정한 것은 당연하였으리라.
계획에 없는 이틀간의 여유가 생겼다. 비행기 시간을 고려해서 이틀 동안 15, 16코스를 걷기로 했다. 제주 시외버스정류소에서 한림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15코스 출발지는 한림항에 있었다.
한림항에 도착하니 지금까지 보아 온 그런 작은 포구가 아니었다. 바다 건너 비양도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오고, 수많은 배들도 바람을 피해 항에 정박 중이며 사람들도 부산히 움직인다.
비양도 도항선 승선장 건너 도선 대합실(待合室) 옆에 있는 올레 간세를 짚고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오늘 날씨는 어제보다는 덜하다. 길은 바로 <한수리>로 들어선다. 한림과 수원의 중간지점이라 하여 <한수리>가 되었다는 마을, 이름만큼이나 마을 역사도 슬프고 자의적이다.
고려 목종 5년(1002년), 바다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비양도가 생길 때, 해수가 마을을 덮쳐 주민 모두가 수장되었다가 5백 년 후에 다시 형성되었다고 한수리 <설촌(設村) 유래>에서 밝히고 있었다.
마을 앞 길가에 둥근 돌담 두 기가 물 위에 떠 있다. 마을 공동 노천탕이다. 한 기는 남탕이요, 한 기는 여탕이리라. 여름이면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용천수로 몸을 식힐 것이다. 세상에 이웃끼리 이런 목욕문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제주 말고 또 있을까 생각하니, 이런 것이 살아가는 지혜요 공생의 현장이다. 생각할수록 행복한 마을이다.
행복한 마을을 지난 길은 수원리로 이어진다. 수원리 표석을 지나 작고 아담한 대수 포구 앞에 이르니 어촌계에서 세운 입간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이름하여 <바당 체험 마을>,
내용을 보니, <테우 가두리 낚시 체험>, <관광 유어장 다이빙 체험>, <교육 학습 체험> 등,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제주의 고유한 생활양식을 체험하게 하는 것으로 여러 가지로 큰 의미 있는 체험이리라. 제주의 민속은 민족의 보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올레길은 해변을 벗어나 내륙으로 들어간다. 마을로 접어든 길 위의 팽나무가 모두 남쪽으로 쏠려있다. 꺾인 듯 가지런한 모습이 예술적이다. 얼마나 북서풍을 맞았으면 저리되었을까! 나무들의 운명이다. 아니 그렇게만 말할 일은 아니고,
강풍을 맞으면서도 꺾이지 않는 저 기개는 바로 제주인의 기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을은 살기 좋은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안길은 넓고 깨끗하고, 주택들은 큼직하고 반듯하고, 밭들도 티 하나 없이 잘 정돈되어 있다. 게다가 고목들이 많이 있어 운치까지 더하니 마을이 더욱 행복해 보인다.
한편, 마을 어귀에 서 있는 공덕 비석들도 질서가 정연하다. 이런 비석거리를 지날 때마다 나는 부러움을 느낀다. 빛나는 선조에 그 고마움을 기리는 착한 후손의 새김, 그것이 비석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제주의 마을만이 가진 고유한 전통이요, 아름다운 유적이다. 육지에서는 흔치 않은 풍경이다. -5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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