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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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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석봉1 2024. 9. 2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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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시민들은 저마다 신을 섬겼고 각자의 방식으로 신심(信心)을 표출했다. 아크로폴리스에 아테네와 니케를 모신 것은 그 둘이 시민 모두가 숭배한 신이어서였을 것이다. 그들은 폴리스의 영광과 번영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파르테논을 지었다.

 

그러나 이 신전은 사회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신의 권능>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와 능력>임을 다툴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증명해 보였다.

 

파르테논은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하는 순간 빛을 잃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자 아테네 여신은 파르테논에서 쫓겨났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독교 예배당이 되어있던 파르테논은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메트 2세가 그리스 본토를 정복한 후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

 

모시는 신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오스만제국의 권력이 흔들리자, 아테네 인근 지역에는 종종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왔고, 마침내 큰 벼락이 떨어졌다. 1687년 베네치아 군대가 아크로폴리스의 오스만제국 병력을 향해 쏜 포탄이 화약 더미에 떨어져 폭발하는 바람에 신전의 기둥 14개가 무너지고 지붕이 통째로 날아간 것이다.

 

그로부터 200년이 더 지났을 때 영국 외교관 엘긴(1799~1803, 오스만 제국의 영국대사)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파르테논의 품을 뒤져 마지막 남아 있던 지갑을 털어갔다.

 

아테네가 그리스왕국의 수도로 부활한 19세기 중반까지 파르테논은 한적한 시골 마을 언덕 위의 무너진 돌덩어리 상태로 버려져 있었다. 이보다 더 참혹한 비운을 겪은 건축물을 나는 알지 못한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의 파르테논 축소 모형을 보면서 엘긴이 무엇을 뜯어갔는지 확인해 보았다. 파르테논은 돌기둥 위에 긴 직사각형 석판을 깔고 지붕을 올렸기 때문에 지붕 아래 석판의 바깥 면이 밖으로 노출되었다. -중략-

 

파르테논 설립자들은 프리즈에 신화와 역사의 주인공들을 부조하고 페디먼트(그리스 신전의 정면)에 조각상을 설치하였다. 코니스와 처마 끝에도 아기자기한 조각상을 붙였으며 건물 전체에 금박과 단장을 칠해 한껏 멋을 냈다.

 

엘긴은 부조가 있는 프리즈를 통째로 뜯어냈고 페디먼트에 남아 있던 조각상을 잘랐으며, 이오니아식 신전인 에레크테이온의 카리아티드(상상의 여신상)도 하나 뜯어갔다. 지금 런던 대영박물관이 <엘긴의 대리석>이라는 이름을 붙여 전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엘긴이 털어간 <파르테논의 마지막 귀중품>이다. 이하 중략.

 

유시민의 유럽 도시 기행 132~34쪽 인용. 각설하고 올레길을 걸어보자.

 

한편, 오현단은 조두석(粗頭石) 서쪽 암벽에 <증주벽립(曾朱璧立)>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왼쪽에는 작은 글자로 후학 채동건 후학 홍경섭 숭정사병진 모각(後學 蔡東健 後學 洪敬燮 崇禎四丙辰 摹刻)이라고 새겨져 있다.

 

살펴보면,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서 보고 있는 것처럼 학습해야 한다. 또는 증자와 주자의 사상을 벽에 새겨 세운다는 뜻이라 한다. 증자(BC505~436)는 공자의 문하생이고, 주자(1130~1200)는 송나라의 유학자를 말함이다.

 

그리고 이 글씨를 본떠서 새긴 사람들은 채동건 당시 제주 목사와 홍경섭 제주 판관이었다. 숭정(崇禎)은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데,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조선 선비들은 청나라 연호를 기피하고 <숭정 후 몇 갑자>라는 식으로 연호를 쓰려고 하였다.

 

명나라는 중화고 청나라는 오랑캐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숭정(崇禎) 후에 네 번째 돌아온 병진년이라는 뜻이므로 1856년이다. 마지막 글자 모각(募刻)은 본떠서 새겼다는 뜻이다.

 

이것은 고영철 제주 문화유산답사회 회장이 제주환경일보202339일 자의 다음과 같은 기고문을 참조하였다.

 

-여기의 글자는 1786년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으로 있던 변성우(邊聖雨)가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의 서울 명륜동 성균관 부근인 숭교방에 음각된 글씨(198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지정), 탁본해 온 것을 채동건 목사와 홍경섭 판관이 철종 7(1856) 오현단 서쪽 암벽에 옮겨 새겼다고 전한다.-

 

오현단을 지난 올레는 이제 동문재래시장 속으로 들어선다. 시장 안은 점포들이 켜놓은 전등으로 대낮처럼 밝았다. 밝은 불빛 아래 비친 만물상은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파는 사람, 사는 사람, 거니는 사람, 목소리는 높았고, 눈빛은 빤짝거린다. 제주에서 가장 붐비는 시장이니 오죽하랴.

 

시장을 나와 올레 간세가 있는 산지천 마당에 들어서니 중년의 소나무 두 그루가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고고하다. 나무 아래 의자에 지친 몸을 앉혀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가 각양각색이다. 시장 입구는 역시 사람들의 거리다. 사람 사는 세상의 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다시 사람들 속으로 발길을 옮겼다.

 

생각하니, 17코스는 제주의 축소판 같았다. 중산간이 있고, 계곡이 있고, 들이 있고, 밭담이 있고, 강이 있고, 월대가 있고, 마을이 있고, 사찰이 있고, 오름이 있고, 해변이 있고, 소금빌레가 있고, 테우가 있고,

 

카페거리가 있고, 호텔이 있고, 공항이 있고, 만년의 용이 있고, 용담이 있고, 관아가 있어 천년의 역사가 있고, 오현단이 있어 선비정신이 살아 있고, 시장이 있어 치열한 삶이 있는 길, 올레의 전형이다.

 

아직 올레를 다 걷지는 않았지만 17코스를 걸어보지 않고는 제주 올레를 말하지 말라고 말 하고 싶다. 오늘도 거친 바람을 만났고, 산듯한 비석거리를 만났고, 거칠고 다정한 풍경을 만났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스쳤다. 그래서 길은 만남의 장소가 되는 것이리라. -38)-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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