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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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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석봉1 2024. 9. 18.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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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나 추석 등 명절에 차례상을 차릴 때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차례상의 제1열에는 과일을, 2열에는 포나 식혜나 나물 등을, 3열에는 탕류<육탕, 소탕(부두류), 어탕 등>, 4열에는 적()과 전(), 5열에는 밥()과 국()과 술()을 올리되 밥은 왼쪽에, 국은 오른쪽에, 술은 메와 갱 사이에 올린다.

 

한편, 사자성어로는 홍동백서(紅東白西, 붉은 것은 동쪽, 흰 것은 서쪽), 좌포우혜(左脯右醯, 마른 것은 왼쪽, 젖은 것은 오른쪽), 어동육서(魚東肉西, 어류는 동쪽, 육류는 서쪽), 두동미서(頭東尾西,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 여기서 동쪽은 제관의 우측이고 서쪽은 제관의 좌측이다. 그리고 조율이시(棗栗梨柿)가 있는데, 다른 것은 모두 말뜻 그대로이나 조율이시는 다소 설명이 필요하겠다.

 

()는 대추인데, 대추나무는 암수가 한 몸이고, 한 나무에 많은 열매가 달리는데, 꽃은 열매가 맺히고 나서 떨어진다. 이는 허투루 핀 꽃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즉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자식을 낳고 키우고 죽어야 한다는 의미로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며,

 

색이 붉어 임금의 용포를 상징하며 왕이나 성현이 될 후손을 의미하고, 대추는 밤과 함께 혼례식 폐백 때 시부모가 며느리 치마폭에 던져주는 것도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뜻이다.

 

()은 밤인데, 땅속에서 밤톨의 촉이 나오고 그 싹을 키우면서 씨 밤은 썩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의 근본을 잊지 말라는 것으로 아버지가 썩어서 아들이 되듯이 조상과의 연결과 한편으로는 밤은 보통 한 송이에 씨알이 세 통인데 이는 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의미한다.

 

()는 배인데, 껍질이 누렇기에 황인종을 뜻하고, 오행에서 황색은 우주의 중심이고 흙의 성분()을 의미한다. 이는 백의민족의 순수함과 밝음을 나타내고, 배는 씨가 6개여서 육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판서를 뜻한다.

 

()는 곶감인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이 천지의 이치나, 감만은 그렇지 않다. 감을 심으면 감나무가 나지 않고 고욤나무가 난다. 그래서 그 고욤나무가 3~5년쯤 자라면 고욤나무에 접을 붙여야 다음 해부터 감이 열린다.

 

이는 사람이 태어났다고 해서 다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고 배워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다. 또한, 감은 씨가 8개인데 이는 8도 관찰사, 감사 등 후손이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나무위키》 《위키백과등 참조함. -각설하고 올레길을 걸어보자.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광해(1575~1641, 재위 1608~1623) 임금을 비롯한 김정, 송시열, 최익현(1833~1906) 등 유배인의 외로운 삶의 현장이 이곳에 있었다는 안내판이 올레꾼을 과거로 돌아가게 한다. 하지만 나는 시간 관계상 세세히 보지는 못해 유배객의 체취를 느끼지 못했다. 언제 다시 와서 이들에게 잔이라도 올리고 싶다.

 

제주도는 유배의 섬이었다. 유배의 역사는 멀리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사에는 21명의 몽골의 귀족과 장군들이 조선의 섬으로 유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지만, 제주가 본격적인 유배지가 된 것은 조선 시대로, 유배객은 대략 2백여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 억울한 선비들이 아닌가 한다.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이니 제주도에 사는 주민들도 유배객만큼이나 외로웠으리라.

 

길은 <제주성>을 꺾어 오현단 후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라 하지만, 성벽은 거의 없어지고, 지금은 오현단의 뒷담으로 일부만 남아 있다. 일제가 항구를 만들면서 성벽의 돌을 골재로 사용하였다 하니, 문화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아까워도 너무 아깝다.

 

나는 수년 전, 직장에서 은퇴하고 서울 도성을 걸어서 한 바퀴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헐어 없어진 성벽을 보고 많이도 실망했었다. 그래서 면역이 생겼지만, 도성인 한성도 마음대로 훼손하였으니 변방인 제주야 오죽하였겠는가. 일제 36년 동안 왜 이토록 국토를 훼철했는지 안타까운 역사에 할 말을 잃었다.

 

허물어진 성을 넘어 총총히 오현단(五賢壇) 경내로 들어서서 크고 작은 비석들 사이로 단을 찾으니 분별키 어렵다. 수없이 제주를 찾았건만, 이곳은 생소하니 스스로 반성할 뿐이다.

 

비탈진 경내를 한참을 헤매다 지붕도 없는 도마 같은 막돌 다섯을 찾을 수 있었다. 드디어 제주기념물 1호인 오현단이 내 앞에 다가왔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 앞에서 <제주성>을 바라보고 줄줄이 서 있는 다섯의 토막 돌, 그 모습이란 내가 그리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너무 초라하였다. 그래서 충격이었다.

 

오현단! 다섯 현인이라, 오현(五賢)으로 모신 분은 김정(1486~1521), 송인수(1487~1547), 정온(1569~1641), 김상헌(1570~1652), 송시열(1601~1689), 모두 조선의 유학자다. 이들 중 송인수와 김상헌은 유배객이 아닌 현직이다.

 

현직 목사나 안무사(安撫使)는 자기 일을 다 했을 뿐일 터인데, 왜 현자가 되어 이곳에 모셔졌는지는 사연이야 있겠지만, 그 사연을 모르는 나로서는 궁금하다. 제주의 명문 오현고의 교명이 여기서 비롯되었음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긴 하다. 36)-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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