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히 온 것 아닌가? 아무것도 없잖아!’ 아테네를 처음 대면했을 때 든 생각이다. 하늘에서 본 아테네국제공항 근처에는 밋밋한 언덕에 아무렇게나 자리 잡은 올리브 나무들과 희끗희끗 얼굴을 내민 땅바닥뿐, 숲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나중 기차를 타고 수도원으로 유명한 북부 테살리아 지역의 메테오라에 가면서 보았더니 아테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어디를 가든 그리스의 대지는 인생의 모진 풍파를 견디고 이겨내느라 기운을 다 써버린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공항철도 승강장으로 가려면 짐을 끌고 계단을 오르내려야 해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고 거리 풍경도 볼 수 있는 X95 리무진 버스를 탔다. 그런데 도시의 중심인 신타그마 광장까지 가는 한 시간 내내 특별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지배적 문화양식으로 자리 잡은 대도시가 다 그렇듯, 야단스러운 간판에 덮인 회백색의 콘크리트 건물만 끝없이 다가오고 멀어졌다. 아테네의 명성은 무엇이었나, 직항 노선이 없어 두바이에서 긴 대기 시간을 쓰면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왔는데, 왜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아테네의 잘못이 아니었다. 도시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찾아간 내 잘못이었다. 아테네라는 이름을 들으면 여러 가지가 떠 오른다. 잔혹 스릴러와 난잡한 멜로가 뒤섞인 고대의 신화,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플라톤의 정치학, 솔론의 개혁과 페리클레스의 민주주의,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서,
소포클레스의 비극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디오니소스의 축제와 공연예술의 탄생, 제1회 근대 올림픽, 배우 멜리나 메르쿠리의 울림 깊은 목소리,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노래<기차는 여덟 시에 떠나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와 배우 앤서니 퀸(1915~2001)의 비틀거리는 춤사위,
비행기표를 예약했을 때는 이런 정보와 이미지가 머릿속을 떠다녔는데, 정작 아테네에 발을 딛자, 그 무엇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아테네 여행자들이 무턱대고 아크로폴리스부터 찾는 것은 이런 불안감을 얼른 해소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유시민의 『도시 기행 1』 19~20쪽에서 인용함. -각설하고 올레길을 걸어보자.
▲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20코스(김녕~하도 올레)
여행 넷째 날 아침, 숙소에서 창밖을 바라보니 날씨도 화창하고 바다도 고요하다. 어제 불던 그 바람은 다 어디로 갔는지, 마치 태풍이 지나고 난 고요처럼, 오늘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 20코스를 걷기로 했다. 첫날 걸었던 19코스의 종착지 김녕 서(西)포구가 오늘의 출발지다.
버스에 내려 포구에 도착하니 올레 스탬프를 찍는 길손들이 제법 도란거린다. 휴일이라 다르다. 포구와 이어지는 마을은 온통 조형물로 치장하고 있다.
길은 그런 조형 예술 마을로 들어가 <청수동 복지회관>을 지나 해변과 마을 길을 넘나들면서 이어지는데,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해변 길섶에 서있는 원형 돌탑 하나가 눈길을 끈다.
흔히 볼 수 있는 연대(煙臺)보다 규모가 작고 아담하다. 알아보니 <도대불>이라는 민간 등대다. 가까이 나간 고깃배들의 등대였으리라.
그 옛날, 긴긴 겨울밤, 고기잡이 나간 가장(家長)을 기다리며 어린 아들의 손을 붙잡고 옛이야기를 들려주며 불빛을 피워 올렸을 여인들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달빛도 없는 그믐날 돌아오는 아버지들의 등불이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돌탑은 이곳에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실제 사용되었다고 하니 두고두고 귀중한 문화유산이 될 것이다.
<도대불>을 지나 멀어지는 쪽빛 바다 위로 여러 개의 높은 풍차가 돌고, 가까이에는 넓은 백사 해변 너머로 너울거리는 코발트 빛 물결이 살랑거린다. 황홀한 해변의 이름이 궁금하여 올레 간세를 보니 <김녕 성세기 해변>이라 적혀있다.
해변은 수심이 깊지 않아 여름에 어린이들이 물놀이하기에 좋겠다는 생각이다. 모래 위를 자세히 보니 그물망이 덮여있다. 아마도 바람에 날려가는 모래를 보호함일 것이다. 제주의 소문난 바람이니 오죽하랴. -39)-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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