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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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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석봉1 2024. 9. 19.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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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폴리스는 <도시(폴리스)의 가장 높은 곳>이다. 지금의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곳인 리카비토스 언덕은 고대 성벽 밖에 있어서 도시에 속하지 않았다. 현대 도시는 가장 높은 곳에 관광용 전망대가 있는 게 보통이지만. 고대에는 그런 곳에 군사 요새가 있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아크로폴리스에 식량과 무기를 쌓아놓고 침략자의 동향을 살피며 다가올 전투를 준비했다. 올라가 보니 과연 그럴만했다. 석회암이 평평하게 깔린 아크로폴리스에서는 도심과 주변 지형뿐만 아니라 해상 관문인 피레우스 항구와 바다까지 환히 볼 수 있었다.

 

그리스 국기가 나부끼는 언덕 동쪽 끝 관측소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코발트색 하늘과 올리브나무 빼고는 온통 회색이었다. 도심의 콘크리트를 다 지워버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자연이 아름다운 도시는 분명히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고대 아테네는,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대부분 B.C.5 세기에 만들어졌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기고 <델로스 동맹(델로스섬에 공동 금고를 두었던 도시국가들의 군사 동맹)>을 이끌었던 아테네의 시민들은 동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그때 대리석으로 거대한 집을 지어 자기네가 믿는 신을 모셨다.

 

승리의 여신을 받드는 니케 신전, <처녀신 아테나>에 봉헌한 파르테논 신전, 전설의 아테네 왕에게 바친 에레크테이온 신전을 다 그 시기에 지었다. 파르테논 귀퉁이의 니케 신전은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에레크테이온은 파르테논 맞은편에서 나름 독자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땅 위에 선 아테네의 고대 유적은 신전뿐이고 시민들이 살았던 흔적은 모두 없어져 땅 밑에만 남아 있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초입에 강화유리를 깔아 생활 시설 발굴 현장을 볼 수 있게 해둔 것은 달리 그런 것을 보여줄 방법이 없어서일 것이다.

 

아테네뿐만 아니라 그리스 전체가 다 그랬다. 영토가 작고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도시의 지배자들은 규모가 큰 주거시설을 지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전성기의 아테네는 민주정이어서 왕이 없었다. 정치 지도자와 귀족들도 흙벽돌을 쌓고 나무로 지붕을 올린 소박한 집에 살았으며 오직 신전만 대리석으로 지었다.

 

유시민의 도시 기행 124~25쪽 인용, 각설하고 올레길을 걸어보자

 

역사의 평가는 뒤로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오현(五賢) 중에서 이곳 제주에서 생을 마감하고 제주풍토록이라는 귀중한 사료를 남긴 <김정>이라는 유배객을 주목하고자 한다. 사실인즉, 오현단은 <김정>을 모신 <귤림서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지 않는가!

 

김정(1486~1520)1597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14년 순창군수가 되었고, 이때 중종이 원비(元妃) () (1487~1557, 단경왕후)를 폐출한 것은 명분 없는 일이라 하여,

 

담양 부사 박상, 무안 현감 류옥과 함께, 순창의 강천산 정자에서 관인(官印)을 걸어두고(관직을 걸고) 복위를 주장하면서 신 씨 폐위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처음으로 상소를 올려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얼마 뒤 다시 등용되어 응교. 전한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부제학, 동부승지, 좌승지, 이조참판,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이처럼 빠른 정치적 승진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 뒤 기묘사화로 인해 금산에 유배당했다.

 

이후 1519년 조씨 성을 가진 사람 즉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음모를 꾸민다는 허위 고발 사건인 주초위왕(走肖爲王)에 연루되어 진도를 거쳐 제주로 귀양 왔다가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사사(賜死)된 아까운 인물이다.

 

그는 시문에 능해 유배 생활 중의 외롭고 괴로운 심정을 시로 달랬고, 좋은 경치를 보고 기개를 기르고자 시를 읊었으며, 지방마다의 생활풍속을 무시했던 이전의 기행문학과는 달리 제주도의 독특한 풍물을 자세히 기록하여 제주풍토록을 남겼다.

 

단경왕후의 복위를 상소한 세 사람의 충의와 선비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변방인 순창에서 지금도 매년 8월이면 삼인문화제(三印文化祭)가 열리고 있다니, 단경(端敬)왕후의 후손인 나로서는 참으로 송구스럽고 감사할 뿐이다. -37)-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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