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제주도와 관련된 수많은 도서(圖書) 중에서 《남환박물(南宦搏物)》이 있는데, 이 책은 제주도의 민속 지(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남환’이란 남쪽 벼슬아치로 제주 목사를 가리키고, 여기서는 그냥 제주를 뜻한다.
본서는 총 38개 항목에 걸쳐 제주도의 역사. 지리. 물산. 자연생태. 봉수 등, 백과사전식의 박물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 한 장에는 탐라를 노래한 시 3편도 싣고 있다.
참고로 38개 항을 열거해 보면,
고을(誌邑號)· 노정(誌路程)· 바다(誌海)· 섬(誌島)· 계절(誌候)· 지리(誌地)· 경승(誌勝)· 사적(誌蹟)· 성씨(誌姓)· 인물(誌人)· 풍속(誌俗)· 문예(誌文)· 무예(誌武)· 전답(誌田)· 토산물(誌産)· 날짐승(誌禽)· 들짐승(誌獸)· 풀(誌草)· 나무(誌木)· 과수원(誌果)· 목장(誌馬牛)· 물고기(誌魚)· 약재(誌藥)· 공물(誌貢)· 부역(誌賦役)· 사당(誌祠)· 관방(誌關防)· 봉수(誌烽)· 창고(誌倉)· 공해(誌廨)· 병제(誌兵)· 공방(誌工)· 노비(誌奴婢)· 관리(誌吏)· 행적(誌行)· 고적(誌古)· 명환(誌名宦)· 황복원대가(荒服願戴歌) 등 38개 항목이다.
황복원대가(荒服願戴歌)는 임금의 감화가 미치지 못하는 먼 나라, 즉 제주 섬을 마음에 품고 생각하는 노래라는 뜻인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탁라가(乇羅歌)> 14절, 김충암의 <우도가(牛島歌)>, 최금남의 <탐라시(眈羅詩)> 35절 등 무릇 156 운(韻)을 차운(次韻)하였다.
지은이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은 효종 4년 5월 인천 죽수리(竹藪里) 소암촌(疎巖村)에서 태어나 영조 9년에 세상을 떠났다. 효령대군 10세 손이다.
이형상은 숙종 3년(1677)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28세 때인 숙종 6년(1680)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승문원 부정사로 벼슬길에 들어서서,
율봉 찰방(察訪). 승문원 정자(正字). 호조 좌랑. 성균관 전적(典籍). 병조 좌랑. 광주 경력(經歷). 성주 목사. 금산 군수. 청주 목사. 동래 부사. 나주 목사. 경주 부윤. 부호군(副護軍). 오위장(五衛將). 제주 목사. 영광 군수 등 내직 4년, 외직 8년 총 12년간 벼슬을 지냈다. 그가 죽은 뒤 정조 20년(1796)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제주 박물(搏物) 이야기는 이쯤하고 계속해서 올렛길을 걸어보자.
이어지는 해변에는 3중의 방파제로 감싸있는 아담한 포구 하나가 옹골차다. 포구는 <화북 포구>다. <화북>은 <조천> 포구와 함께 관리나 유배객들이 드나들던 제주의 옛 관문이었고, 모두 9진(鎭)에 속하는 군사 기지였다.
영조 시절 노구를 이끌고 축항(築港) 공사를 독려한 김정(1670~1737) 목사는 이곳을 제주의 목구멍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목구멍을 생각하니 갑자기 인체의 구멍이 생각난다. 사람의 몸에는 과연 몇 개의 구멍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아홉 개, 아니면 열 개?
김 목사는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다가 제주에서 별세하였다. 향년 68세, 목사의 <공덕비>가 해변 비석(碑石)거리에 찬연히 서 있다. 김정은 경북 봉화 출신으로 옥천군수. 강릉 부사를 거쳐 말년에 제주 목사로 부임, 재임하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그의 위패는 봉화의 <오천서원>과 제주시 이도 1동에 있는 <영혜사(永惠祠)>에 모셔져 있다고 전한다. 여기 노봉(蘆峯) 김정(金政)은 오현단에 향배 된 유배객 충암(沖菴) 김정(金淨, 1486~1521)과는 다른 인물이다.
충암(沖菴)이 184년 앞선다. 충암은 1514년 순창군수 시절에 중종이 왕후를 폐출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중종께 명분에 어긋난다고 폐비(단경왕후)를 복원하라는 상소를 올린바 있는 대쪽 같은 선비다. 그는 17코스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비석거리를 지나니 <화북> 포구 올레 쉼터 옆에 <해신사>가 길손을 반긴다. <해신사>는 바다의 신을 모신 사당이다. 제주에는 이런 신을 모시는 사당이 무수히 많다. 제신의 고장이라 할 만큼, 마을에는 본향당. 산에는 산신당. 바다에는 해신당이 그들이다.
귀양에서 풀려난 추사 김정희가 돌아갈 때 이곳에 제문을 지어 올렸다고 전한다. 여기 신당에 제문을 올린 사람이 어디 그분뿐이겠는가, 담장 뒤 <해신사> 화장실에 들어가 소변을 보니 가정집보다 더 깨끗하다. 손을 씻고 해변을 걸으니 갑자기 시장기가 돌았다.
비웠으니 채워야 하는 것은 생리적 현상이다. 마침 마을 어귀에 허름한 식당이 있었다. 주차장에 차량이 많은 걸 보니 음식 맛이 좋은 집이라는 걸 알 수 있겠다. 손님들로 가득한 동태탕 전문 집이었다. 우리는 어제처럼 과식하지는 않았다. 26)-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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