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19코스(조천~김령 올레)
*새에겐 둥지가 있고, 거미에겐 거미줄이 있듯, 사람에겐 우정이 있다.* 각설하고,
두 번째 올레 여행 첫날 아침, 19코스 시작점인 <조천만세동산>은 제주의 대표 성지답게 양지바른 위치에 넓은 잔디밭에 포근하게 자리하고 있다. 어제 내린 비로 깨끗해진 잔디밭은 겨울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났다.
대한민국 방방곡곡 독립운동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을까만, 이곳처럼 성역화된 곳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 의식이 강한 제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역사는 이렇게 후손이 만들어 간다. 관광객 몇 사람이 입구에서 핸드폰을 눌러대고 있었다.
우리는 성지 입구의 <독립운동 기념탑>에 올라 묵념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 햇살에 비친 기념탑은 긴 그림자만 드리우고 말이 없다. 말 없는 기념탑을 뒤로하고 동산을 내려서 경내로 들어서니 저만치 한 청년이 빨간 배낭을 메고 노란 잔디 위를 걷고 있다. 단정한 그이 모습이 경쾌하다. 우리도 경쾌하게 그를 따라 걷는다.
혼자 걸어도 멋있는 길을 두 사람이 걸어, 광장 중앙에 있는 높이 25m의 <애국선열추모탑(愛國先㤠追慕塔)>과 그 뒤의 창렬사(彰烈詞)를 돌아 항일 독립 유공자 비석 군(群)을 지나니, 오른쪽 가장자리에 아담한 2층 건물 하나, 참 단아(端雅)하다.
<제주 항일기념관>이라는 간판이 우리의 발길을 당긴다. 천 원짜리 한 장으로 입장권 두 장을 받아 안으로 들어서니 건물 외양만큼이나 정갈하다.
특히 로비에 줄지어 서 있는 경구(警句) 현수막들의 가지런한 모습이 인상적(印象的)인데, 가만히 보니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유묵(遺墨) 복사판들이다. 독립운동하면 안 의사님이 대부(代父)이시니 참 좋은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낸다. 의사(義士)님은 순국(殉國)이지만 살아 계심을 느낀다.
기념관 내부를 둘러보자. 제주도 기미 독립 만세운동의 중심지가 이곳 조천이라는 것과 삼일운동 5개월 전에 이미 제주의 한 사찰(법정사)에서 경찰 주재소(駐在所)를 습격하는 등 조직적인 항일운동이 있었다는 사실도 같이 알리고 있다. 이런 변방의 섬에서 이처럼 위대한 선각자들이 계셨다니 나는 아침부터 감격하여 목울대가 곤두선다.
기념관을 나서려는데 출구 쪽 탁자 위에<일일불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이라는 경구의 한지가 수북이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손바닥 도장이 검게 찍혀있는 참 낯익은 글씨였다. 머뭇거리는 나에게 기념관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 의사(義士)님 장인(掌印), 체험 한번 하실래요?
-장인 체험? 어떻게?
-아, 안중근 의사님은 거사 전 해에 소위 <단지동맹>을 하시면서 왼손 약지를 자르셨거든요. 의사님은 그 이후로는 글씨를 쓰시고 낙관으로 손바닥을 이용하였어요. 그게 여기 장인(掌印)입니다.
기념관 직원이 손가락으로 손도장을 찍는 시늉을 해 보였다.
-비어있는 이 종이 위에 방문객들께서 스스로 안 의사님의 심정으로 손바닥 도장을 찍어 보는 거지요.
-기념관에서 좋은 일을 하시네요.
*부부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말이다.*
-여러분이 체험한 이 경구 한지를 기념으로 가지고 가셔도 좋습니다.
친절한 안내에 고개를 숙인 부부는 왼손 넷째 손가락 끝을 종이로 가리고 미리 준비된 먹물로 손바닥을 칠한 다음, 한지 위에 눌렀다. 의사님의 높은 정신을 함부로 흉내만 내는 것 같아 송구스럽기도 하다.
경구를 가보(家寶)로 간직하고 싶다. 실제로 내가 찍은 그 경구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보관 중이다. 밥보다 더 중한 것이, 독서라는 말씀을 의사님은 차가운 여순감옥에서 가슴으로 쓰셨을 것이다. 제주 올레를 걸으면서 인류의 스승을 만나니 가슴이 더욱 뜨거워진다.
여행에서 돌아와 살펴보니 의사님의 유묵(遺墨) 26점이 보물(569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만약 기념관 직원이 이 사실을 관람객들에게 일일이 안내했더라면 준비한 한지는 매일 동이 났을 것이다. 그날 우리는 손바닥 도장을 찍은 경구는 보물 제569~2호였다.
올레길은 기념관 화장실을 돌아서 조천리 밭길을 조금 걷다가 해변으로 이어진다. 출렁거리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 길은 일몰(日沒)의 명소라는 <관곶>을 지나 신흥리로 들어서는데, 매서운 해풍이 얼굴을 후려친다.
그런 바닷길을 좀 걸어 나가니 아담한 포구가 쪽배 서너 척을 품고 있고, 바다 위에 돌탑 두 기가 밀려오는 파도를 받으며 갈매기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돌탑은 마을의 액운을 방지한다는 방사탑(防邪塔)이다. -20)-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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