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21

기행문

by 웅석봉1 2024. 9. 1. 13:38

본문

방사탑은 육지의 장승이나 솟대와 같은 의미로 세워졌지만, 이들이 따라오지 못할 예술미를 지녔다. 제주의 독특한 돌 문화의 기본형이다. 이런 방사탑이 제주도 해안마을 곳곳에 있다는데, 지금은 17기 만이 제주 민속자료 8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 신흥리 방사탑 2기도 문화재로 지정된 방사탑이다.

 

길은 해변으로 이어지는데, 마을회관 앞엔 맨몸으로 해풍을 맞는 팽나무 두 그루가 부는 바람 속에서 인내 중이다. 인내하는 부부 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일 것이다. 수호신은 언제나 신령스럽다. 신령스러운 나무 밑에서 저 먼 곳을 보니 서우봉(犀牛峰) 검은 머리가 어른거린다. 살찐 물소가 뭍으로 기어오르는 형상이라 하여 서우봉이라 명명하였다 전한다.

 

부는 바람 따라 우리도 흔들리면서 계속 걷는다. 어촌계를 지나니 조그만 편의점 앞에 노란 감귤이 파란 바구니에 소복이 담겨있었다. 무료 시식용이란 푯말에 이끌려 서너 개를 집어 들었다. 길손들을 배려하는 마음에 감사를 전한다. 그냥 나오기가 미안하여 생수 한 병을 사고 또 걸었다.

 

길은 마을과 밭담을 지나 함덕리 서우봉 해변 길로 이어지는데, 흰 모래사장과 현대식 건물들이 길 양옆으로 조화를 이룬다. 우리가 묵은 숙소도 이곳 어딘가에 있다.

 

해변에는 음식점과 숙박업소들이 가득하고, 간간이 가족 여행객들이 겨울 바다를 즐기는 모습은 평화스럽고 이국적이다. 육지에 있는 여느 해수욕장의 겨울 풍경과는 판이하다.

 

우리는 볼거리가 많은 해수욕장 끝자락에 있는 조용한 카페에서 가벼운 휴식을 취하고 길을 걸었다. 모래밭을 가로질러 둥근 오름 하나로 향하는데, 검은 현무암의 작은 비석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의사자(義士者) 고보련 추모비(追慕碑)>,

 

성은 고 씨요 이름은 보련, 꽃다운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친구를 구하고, 그녀는 승천하였다. 얼마나 의로운가,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다. 2005723일의 일이다. 나는 의로운 여학생에게 감사와 하늘나라에서 편히 잠드시라고 기도하고 돌아섰다.

 

<고보련 추모비>를 지나 작은 나무 구름다리를 건너서니 오름의 초입으로 들어선다. 오름은 바로 서우봉이다. 주민들이 힘들여 만들었다는 가파른 산길을 돌아 산 중턱에 서니 작은 정자가 길손을 반긴다. 정자에서 숨 한번 크게 내쉬고 뒤를 돌아보니, 하얀 포말(泡沫)이 해변을 계속해서 덮치고 있다. 저렇게 끈질기니 모래가 남아날 리가 없을 것도 같았다.

 

올레길은 정상을 비켜서 산허리를 감싸고 돈다.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산길은 언제나 최고의 길이다. 가슴도 트이고 눈도 시원하다. 거칠 것이 없는 길이다. 발은 봉우리를 내려서 해변을 한참 걷는다.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해변을 수놓은 길을 지나 작은 포구 어촌을 넘어 숲길을 걸으니, 숲속에 건물 하나가 앞을 막는다. 포구는 해동 포구였고, 건물은 4.3 기념관이었다.

 

건물 입구 바위에 새겨진 글, <너븐숭이 4.3 위령 성지>란 글자가 붉은 피를 흘리고 있다. 제주도 인구의 1할이 희생된 사건, 194731일부터 무려 77개월 동안이나 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죽인 대학살의 역사가 제주 4.3 사건이다. 그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제주도의 아픈 현대사다.

 

-입장료 없으니 그냥 들어오세요.

 

미안한 마음에 차마 들어서지 못하고 주변만 돌고 있는 부부를 본 기념관 여직원이 한 말이다. 이곳 북촌리는 4.3 사건의 최대 피해지역이라 한다. 남녀노소 구분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하루 동안 3백이 넘는 양민을 집단 학살한 그 현장이다. 성지에 엎드려있는 얘기 무덤들이 증언한다.

 

제주도 출신 현기영(1941~ )의 소설 <순이 삼촌>의 실제무대가 여기다. 위령 성지에는 현기영의 <순이 삼촌> 문학비와, <얘기 무덤> 시비가 세워져 있다. 제주 출신 양영길 시인이 쓴 <얘기 무덤 앞에서>의 시 일부를 여기 옮긴다.

 

한라 영산이 푸르게/ 푸르게 지켜보는 조천읍 북촌마을/ 4. 3사태 때 군인 한두 명 다쳤다고/ 마을 사람 모두 불러 모아 무차별 난사했던/ 총부리 서슬이 아직도 남아 있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너븐숭이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사람이 죽으면/ 흙 속에 묻히는 줄로만 알았던 우리 눈에는/ 너무 낯선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목이 메인다- 이하 생략-

 

차마 더는 볼 수도 읽을 수도 없어 발길을 돌려, 위령 성지 마당 끝자락으로 다가가니 검은 비석 하나가 북풍을 맞으며 외롭게 서 있다. 비석엔 <제주 4.3 희생자 북촌리 원혼 위령비(慰靈碑)>란 흰 글씨가 선명하다.

 

학살 사건은 1947년부터였는데, 위령비를 세운 것은 2007년이니 너무도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200310<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어 정부의 사과, 추모기념일 지정, 평화공원 조성 등 후속 조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동안 구천(九天)을 떠돈 원혼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두렵다.

 

북촌리는 한라산 정상에서 정북 방향이라 북촌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북쪽은 항상 춥고 외로운 곳이다. 그래서 오늘도 춥고 바람도 세차다. 원혼들의 명복을 빌면서 성지를 벗어났다. -21)- 계속-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