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문화관 기행기>
2009년 6월 나는 아내와 강원도 원주로 나들이를 나갔다. 박경리 문학 공원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토지>는 박경리의 대표적 대하소설이다. 아내도 나도 과거에 <토지>를 감명 깊게 읽었다. 그래서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토지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6월 초순 어느 날, 하늘도 맑았고, 바람도 없었다. 아내와 둘이 원주로 차를 몰았다. 모처럼 둘만의 여행이다. 기꺼이 동행해 준 어부인이 고맙다.
*나는 아내를 직접 부를 때는 ‘여보’라 하고, 이렇게 책에서 부를 때는 어부인(어렵고 까칠한 부인 때로는 어질어 빠진 부인)이라 한다. 그것은 그녀와 내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그녀의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초여름의 푸르름과 끈적거리는 땀 냄새를 맡으면서, 우리는 박경리 선생이 생의 마지막 순간들을 지내셨다는 원주시 흥업면 '토지문화관' 입구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문화관은 2층짜리 앞 건물과 3층짜리 뒤쪽 건물이 산자락에 고즈넉이 앉혀 있었다. 그 오른쪽으로 선생께서 거처하셨던 아담한 주택이 숲속에 숨은 듯 입구는 잠겨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앞 건물과 뒤 건물 사이의 식당 동에서 문학 지망생들로 보이는 대여섯이 식사하는 모습도 보였다. 2층 건물 입구에 들어서니 현관에 큰 북이 우리를 맞이한다. 지역 예술 단체장께서 기증하셨다고 되어 있다. 왜 북인가! 시종을 알리는 소리 아니던가!
현관에서 오른쪽으로 아담한 강의실이 있고 그 강의실 출입문 위쪽 벽에 커다란 사진 한 장이 걸려 있는데, 선생과 그의 어머님 두 분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다. 가히 미인들이시다. 선생은 육칠 세의 꼬마 소녀다.
1층 현관 왼쪽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선생께서 생시에 쓰시던 유품들이 유리창 안에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었다. 안경, 만년필, 재봉틀, 옷, 담배쌈지, 국어사전 등이다. 모두 오래된 물건이다. 손때가 반질반질하다.
"글이 쓰이지 않을 때는 저 재봉틀을 돌리셨다지?" 내가 어부인에게 말하니, 그녀는 선생께서 손수 만든 담배쌈지를 발견하고서 놀란다. “선생님께서 담배도 피우셨나?” 평생을 홀로 사셨으니 오죽 고독하셨을까. 나는 묵묵부답으로 답했다.
벽에는 선생의 여고 시절 진주 촉석루를 배경으로 남강 변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 고색창연하다. 강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도 기이하다. 촉석루를 자주 찾은 우리는 그 사진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의암(義庵)이 여기 어디쯤 있을 건데 아쉽다 했다.
논개 할머니가 임진왜란 때 왜장(倭將)을 껴안고 투신한 그 바위 말이다. 아마 선생께서 그 사진을 찍을 때 의암(義庵)을 어찌 보시지 않았겠는가. 확실히 보시고도 못 본 척, 하셨으리라! 하도 애잔하였으니……,
2층은 출입이 제한되어 1층만 보고 나와서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3층 건물 뒤쪽에는 아담한 야외 공연장이 잘 꾸며져 있었다. 돌층계의 객석에는 나무 그늘로 시원하지만, 객석 앞의 공연 무대는 뙤약볕이 따갑다.
“너무 불공평해. 객석보다 공연자를 생각해야지?” 어부인이 한마디 한다. 나는 속으론 긍정하면서 겉으로는 “지금이 여름이니 그렇지, 겨울이면 다를 거야. 세상에 불공평은 없을걸.” 농을 쳐본다.
'토지문화관' 건물과 선생의 주거동 사이에는 찔레꽃 넝쿨이 사람 키를 넘긴다. 가시 난 장미 줄기도 주위를 지키고 있다.
초입에 '토지문화관'이라 쓴 표지석 옆에서 산세를 둘러보니,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솟구치는 듯하다. 눈을 어깨높이로 내리니 야트막한 밭떼기들이 푸른 옷을 입고 있다. 옥수수, 땅콩, 고구마, 고추가 제각기 색색거리고 있다.
오른쪽 아래로 지방도로와 맞붙여 아담한 2층 건물 하나가 붉게 물들어 있다. '토지문화관' 부속 건물이리라. 선생께서 생전에 작가나 그 지망생들을 위하여 창작의 산실로 제공하기 위한 공간들이다.
우리나라에 그 많은 문학인 중에 그 누가 후학들을 위하여 이러한 배려가 있었던가? 생각하니 다시 한번 선생이 그리워진다. 저절로 옷깃이 여며진다.
푸르른 산야 속 선생의 숨결을 뒤로하고, 차를 몰아 원주 시내 단구동에 있는 '박경리 문학 공원'으로 향하면서 생전에 선생을 한 번이라도 뵙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명복을 빕니다.
중간중간에 군것질해서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점심은 때워야 할 것 같아 문학 공원에 차를 세우고 주변에 있는 <갯바위 해물 칼국수> 집에서 얼큰한 칼국수로 아주 늦은 점심을 먹었다. 칼국수는 어부인이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다.
박경리 문학공원은 아파트와 접해있었고 단정하고 깔끔하였다. 정원도 꽤 크다. 입구에는 토지의 주요 장면과 작가의 변을 쓴 세로로 된 현수막들이 세워져 있다.
가슴을 쓰리게 하는 아름다운 글들이다. 그 글 중에 특히 선생께서 1973년 6월 3일 자에 적으신 1부를 끝낸 소감이 인상 깊다. 그 소감의 마지막 부분을 적어본다.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그것은 더욱 험난한 길이 남아 있다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고독의 심연에서 오직 펜만을 붙들고 맨몸으로 헤엄치는 그 모습이 아닌가. 눈에 선하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2층 전시관으로 올랐다. 방명록에 이름 석 자를 올리고, 내부를 둘러보니, 토지 1~5부의 시대적 배경과 큰 줄거리가 사방의 벽면에 장식되어 있다. 벽 앞쪽으로는 선생의 시들이 줄지어 서 있다.
전시관 중앙 기둥에는 토지의 활동무대가 된 평사리, 용정, 서울, 진주 등이 표시된 지도와 그 위에 그 지역에서 활동한 내용이 적혀있다.
한참을 토지 속에 푹 빠져 헤매고 나니 그 옛날 젊은 시절 토지 1부를 붙들고 울고 웃던 아련한 추억들이 이곳을 평사리인가? 혼동케 하였다.
꿈을 꾸듯 평사리 마당을 지나 홍이 동산과 용두레 벌을 한 바퀴 돌아 선생께서 1980년부터 18년 동안 살면서 토지를 완성 해낸 아담한 흰색의 양옥집 대문을 들어섰다.
마당은 넓었다. 마당 가의 아주 작은 연못에 연잎이 떠 있고, 모퉁이 남새밭엔 고추, 아욱, 가지가 꽃잎들을 나불거리고 있었다. 아늑하고 여유로운 남향집이다.
마당 저편 소나무 그늘에서는 건장한 청년이 소리 내어 책을 읽고 있다. 그것도 서서 읽고 있다. 아마 『토지』가 아닐까 한다.
소설 『토지』는 작가가 2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두고 원고지 3만 매가 넘는 분량을 혼으로, 피로 쓴 근대 우리 민족 애환의 서사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 직후인 1897년의 한가위부터 광복의 기쁨을 맞는 1945년 8월 15일까지 48년간이다.
『토지』는 이곳 서재에서 1994년 8월 15일 새벽 2시에 완성되었다. 그날 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끝났는지 실감이 나지 않아요. 배만 살살 좀 아프네요."
박경리는 1926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하여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1946년에 결혼했으나 1950년 12월 남편과 사별하였다. 그 고통이 창작의 시작이었다 한다. 그 후 2008년 향년 81세로 별세하였다.
줄곧 서울에서 살다가 1980년에 이곳 원주로 이사하였다. 선생은 왜 원주이었을까, 그녀는 말했다. "내가 원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산천을 사랑한다는 얘기다. 원주는 원래의 대지, 그러니까 산천. 본질적인 땅이란 뜻이다. 이름 그 자체를 나는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렇다. 『토지』를 완성하기 위하여 작가는 원래의 토지, 원주(原州)를 택한 것이다. 그것은 성공을 예감한 이주였다. 그래서 지금 이 공원이 이렇게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박경리 문학 공원'은 대지가 3,200평이다. 도심 속에 있는 건물치고는 작지 않다. 그리고 선생께서 집필하시던 이 집, 그 정원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원주시민은 물론이요, 국민을 위하여 매우 좋은 일이다. 아니다. 우리 국민뿐만이 아니라, 세계 인류를 위해서도 유익한 일이다.
'원주'는 군사도시였다. 지금은 교육의 도시다. 그리고 옛날엔 선비의 고장이었다. '원주'의 인물로는 세종 때의 명재상 '황희'가 있고, 저 유명한 문사 '허균', '허난설헌' 자매도 여기 출신이다. 임경업 장군,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 등 일일이 나열치 못함이 아쉽다.
원주의 나무는 은행이다. 은행은 '수명이 길어 숭배의 나무다. 그리고 화합, 단결, 영원한 전진을 의미'한다. 그리고 원주의 꽃은 장미다. 또한, 원주의 새는 꿩이다. 장미는 누구나 좋아하는 꽃이니 알겠는데 왜? 꿩인지는 모르겠다. 꿩을 지역의 새로 지정한 도시는 아마 원주밖에 없을듯하다.
두어 시간 공원 안팎을 돌았다. 홍이공원 나무 그늘이 시원하였다. 등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다. 시원한 그늘에 동네 할머니 두 분이 자리를 깔고서 햇마늘을 까고 있다. 그 옆에는 젊은 아낙이 젖먹이를 안고 졸고 있다. 참으로 한가롭다.
선생은 외동딸 하나를 둔 청상과부다. 그녀의 사위가 김지하 시인이다. 선생은 외롭고 고단한 삶을 문학으로 채워 나갔다.
1955년 『계산』으로 문단에 등단한 이후 53년간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은 『토지』 외에도 수도 없이 많다. 『불신 시대(1957)』, 『표류도(1959)』, 『김 약국의 딸들(1962)』, 『파시(1964)』, 『시장과 전장(1964)』 그리고 많은 시집이 있다. 또 대학에서 강의도 하셨다.
선생은 떠나셨다. 하지만, 잿빛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선생의 초상은 변함이 없다. 선생은 거목이다. 거목은 그늘이 넓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밑으로 모인다.
평일인데도 관람객이 여럿 있다. 초여름 해거름의 그림자가 늘어진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나는 선생님의 숨결을 느끼면서 홍이 동산을 빠져나왔다. “임은 가셨지만, 아직 우리는 차마 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독백을 마시면서 핸들을 돌렸다. 선생님의 명복을 빌면서……, 2010. 동인지 게재.
집으로 돌아와 딸아이의 도움을 받아 노트북에 글쓰기를 마치니 다음 날 새벽 2시였다. 우리가 토지 문학관을 찾은 날은 2009년 6월 8일이었다. 내가 농협에서 은퇴한 다음 해다. 나의 오래된 일기장에 적혀있다. 이후 나는 문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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