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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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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석봉1 2024. 8. 25.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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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두선 머리칼을 누르면서 저 꿩만큼이나 가파른 길을 내려와 숲속을 빠져나오니 왼쪽 산기슭에 목장 한 채, 마소들이 한가롭다. 가만히 거기 놓여있는데도 반갑다.

 

이제 걸음도 느려지고, 계곡과 개천을 벗어나니 파란 보리밭, 보리밭을 넘으니 드디어 길은 끝나고 콘크리트 다리가 앞을 막는다. 다리 아래는 시퍼런 강물이 침묵을 품었다.

 

강물 위에 보트 몇 척이 바람에 흔들거리는 것으로 보아 여기도 여름이면 수상 레저를 즐기는 놀이터일 것이다. 다리 옆 조그만 공원 속에 화장실이 있어 볼일을 보고 올레 리본을 찾으니 올레 화살 표시가 길을 안내한다. 길은 다리를 건너가란다.

 

제주 자치도의 안내판은 <창고천>인데 강 위에 놓인 다리 난간의 이름표는 <황개천 교>라 쓰여있으니 헷갈린다. <황개천>의 올레 간세에는 가끔 누런 물개가 나타나 울었다고 해서 황개천이 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한다. 창고천은 왜 창고천인지는 사연이 있겠으나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그냥 지나간다.

 

걷는 길 왼쪽으로는 흰 굴뚝이 높게 솟은 공장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박수기정 위에서부터 보아온 건물인데 가까이서 보니 발전소다. 원자력이나 수력은 아닐 것이고 화력발전소이리라. 왜 하필 이곳에 화력발전소를 지었는지 모를 일이다. 풍력발전소라면 오케이!

 

발전소 앞에는 <화순리 선사마을 유적공원>이란 아담한 쉼터가 우리를 맞아준다. 오래된 조상님을 만난 기분이다. 공원에 앉아 잠시 몸을 풀었다.

 

하지만 유적공원에는 유적은 없고 모형들이 옹기종기 있다. 발전소를 건설하면서 발굴된 것이라 하는데 토기와 움막 몇 점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탐라 형성기에 제주 서남부지역 최대 거점 주거지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이왕지사 유적공원은 좀 더 세밀한 조사와 발굴이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마도 발굴한 유적은 박물관에 보관 중이겠지만, 좀 허술해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유적공원을 지나 아스팔트 길을 걷고 청색 올레 화살표를 따라 마을 길을 지나니 넓은 해변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 이름도 찬란한 <화순금모래해변>, 모래가 누르스름한 금빛이다. 제주에서는 유명하다는 해변이다.

 

해변의 모퉁이에 선 종착지 올레 간세를 만나니 온몸이 노곤하다. 거리는 짧았지만, 만만찮은 코스다. 긴장이 풀리는 순간, 누군가가 괴성을 질렀다.

 

-! 이럴 수가, 오늘 길은 무효야!

 

간세 옆의 작은 푯말을 보고 있던 어부인의 소프라노 목소리다. 그 소리에 나도 놀라, 푯말을 급히 읽었다.

 

*소나무재선충 방제작업으로 인해 임시 통제합니다. 제주 올레 9코스*

 

! 어쩐지? 수상한 장면 몇 개가 다가온다. 재선충 방제 현장이 곳곳에서 진행 중이었다는 사실, 코스 내내 올레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 분명히 올레 리본이 달려있는데도 그물로 길을 막고 있는 곳이 있었다는 사실, 이상한 구조물이 설치되어있다는 사실,

 

더욱이 무엇보다도 계곡을 끼고 걸으면서 등골이 오싹오싹했다는 사실이 이제야 머리털을 녹인다. 길은 정상적인 올레가 아니었다.

 

다만, 이상한 쇠 파이프 구조물이 길을 막았는데, 그것은 마소의 이동을 통제하는 장치로 올레길의 폐쇄와는 관계가 없었다는 사실을 다른 코스를 걸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러면 그렇지, 제주 올레가 누군데 이렇게 방치될 수 있겠는가. 힘내라 제주 올레!

 

제주 올레길, 사전에 확인하고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올레 첫 여행에서 배웠다. 하지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오늘의 행운에 행복감을 느꼈다. 통제 팻말이 코스 시작점에도 분명히 있었을 터, 만약 그때 보았다면 오늘 코스는 걷지 못했을 것이 자명한 일이니 그걸 못 본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 하하하 모르는 게 약이었어.

 

그러나 9코스는 상당히 주의가 필요한 길임에는 분명하다. 중간에 음식점이나 쉼터가 없어 속이 빈 상태에서 출발하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겠다. 우리도 처음에 길을 나설 때 힘들면 중간에 포기하기로 했었지만, 다행히 어부인의 컨디션이 걱정할 정도는 아닌듯해서 완주하였다.

 

만약에 중간에서 탈이라도 났으면 코스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혼자서 걷기에는 위험스럽고 으스스하여 부담스러운 길이라는 점이다.

 

그날 밤 우리는 서귀포 중앙로터리 부근에서 얼큰한 해물 도가니탕과 막걸리 한 사발로 배를 채우고 하루의 긴장감을 녹였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열나흘 만월이 간간이 부부의 상기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15)-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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