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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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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석봉1 2024. 8. 17.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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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외돌개를 둘러보면서 바다라는 존재가 과연 두렵기도 하고, 비장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올레가 있어 외돌개는 외롭지 않았다.

 

외롭지 않은 외돌개를 뒤로하고 숲길을 조금 걸으니 절벽 위의 언덕이 시원스럽다. 드라마 대장금의 주인공 형상이 바람 부는 언덕에 서 있다. 관광객들을 위한 포토 존이다.

 

흐린 겨울날인데도 언덕 위는 관광객으로 만원이다. 언덕은 넓었고 그 위의 전망은 온통 푸른 바다요 검은 바위다. 명명하여 <폭풍의 언덕>이라 하였다. 여기까지가 외돌개 관광지다.

 

넓은 언덕을 나선 길은 해변으로 이어지는데, 저 멀리 한라산에는 흰 눈구름이 아늑하고, 발아래 길옆으로 난 파릇파릇한 풀들의 길섶을 걸으며 문득 낙엽이 그리워졌다. 그리워졌다기보다는 낙엽이 애처롭게 다가왔다.

 

낙엽! 누가 낙엽을 꽃보다 아름답다 했던가. 누가 저녁노을이 떠오르는 아침 태양보다 아름답다 했던가! 제주의 겨울 바닷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의 넋두리일 것이다. 단언하지만, 푸르름은 붉음보다 더 가슴 뛰게 한다.

 

내 마음속에 그리던 꼭 그런 올레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책로, <돔베낭길>을 한참 걸어 들어가니 공용주차장이 나온다. <돔베낭길>은 동백나무가 지천인 골짜기라는 뜻이다.

 

여기서 길은 마을로 올라선다. 간간이 숙박업소나 음식점들이 길섶을 지키고 있는 길은 <서귀포 여자고등학교> 담장을 돌아선다.

 

여고 시절을 보낸 그녀들을 잠깐 생각하며 아스팔트 길을, 걸어 나가니 물이 흐르는 <속골천>이라는 해변 개울가에 이른다. <속 골> 개울가 작은 쉼터에는 우체통 여럿이 걸려있다. 그중 한 우체통의 색깔이 초록이고 나머지는 모두 빨강이다.

 

초록에는 보내지 못할 편지를 넣고, 빨강에 넣은 편지는 1년 후에 배달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어라,……, 이건 아닌데, 그러나 고쳐 생각하니 이해가 된다. 편지의 상식을 파괴하는 발상이다. 대륜동 <주민 자치 위원회>가 만든 우체통의 의미를 생각하며 길을 걷는다.

 

성찰과 배려가 동시에 나의 목울대를 또 울린다. 그런 배려의 개울을 건너니 오른쪽으로 높은 소철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왼쪽은 쪽빛 바다다. 양지바른 바닷가에는 소라와 해삼을 파는 포장마차가 그곳이 제자리인 양 영업 중이다.

 

허름한 나무 탁자를 가운데 두고 남녀 대여섯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에서 시장기()가 돌았다. 그래서 우리도 의자에 앉아 해삼과 소라 한 접시를 주문했다.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인 우리는 그림 같은 바닷길을 걸어 나갔다.

 

바닷길은 자갈길과 흙길을 번갈아 가면서 길손들의 발바닥을 두드린다. 아프고도 시원하다. <수봉>이라는 의인이, 사라진 길을 새로 찾아 만들었다 하여 <수봉로>라 이름 붙인 길이다. 길을 낸 사람의 노력과 정성이 아름답고 고맙다.

 

그런 길 끝자락의 소나무 숲을 돌아서니 멋진 포구가 이중 삼중의 방파제에 안겨있다. 포구 안에는 고깃배 서너 척이 바람에 흔들거린다. <법환포구>. 포구를 낀 아스팔트 길 위로는 식당들이 여럿이다. 상당히 큰 마을이다.

 

걷기를 시작한 지 서너 시간, 작은 식당으로 들어가 늦은 점심으로 먹음직스러운 은갈치 구이를 시켰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자, 두 쌍의 남녀가 옆자리에 앉는다. 이어서 주인의 얼굴이 밝아진다.

 

원래 올레 여행은 <놀멍 쉬멍 먹으멍> 걷는 게 재미 아니겠는가. 먹고 또 걸었다. 길은 계속해서 왼쪽으로 해변을 끼고 걷는데 오른쪽은 마을과 들과 비닐하우스들이다. 그런 길을 한참을 걸으니 작은 다리 하나가 길을 막는다.

 

맑은 물줄기 따라 걷은 길모퉁이 다리 위에서, 나는 그만 가슴이 막혀 주저앉고 말았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이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니……, 얼마나 놀랐으면 그랬을까.

 

자세히 보니. 길고 높은 공사 칸막이가 철조망처럼 아프다. 길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헝겊 조각 위의 글귀들도 슬프다. 여기가 거긴가! 강정 사태를 까맣게 잊고, 여기 온 내 자신에 새삼 놀랐다. 마무리된 사업인 줄 알았는데 이곳은 아직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평생을 고기잡이로, 귤 농사로 살아온 바닷가 마을 사람들이 눈물로 호소합니다> <마을을 잃고 싶지 않다고, 바다를 잃고 싶지 않다고, 이 따스한 모든 것을 죽여선 안 된다고>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평화스러운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고, 멸종위기 생물 종이 숨 쉬고 있는 바다를 죽이고, 인간의 손재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아름다운 구럼비를 부숴버리고, 얻어야 하는 그 잘난 안보가 무엇인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이곳 사람들이 낡은 나무판에 쓴 <항의> 글들이다. 결론이 난 국책사업이라면서 저 아픈 글귀들은 무엇인가.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현장을 걷는 나로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명색이 제주올레를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는 수긍하기 어렵다. 7)-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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