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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가 그린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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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석봉1 2024. 2. 1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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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感氣)가 그린 자화상

 

이번 놈은 유별나다. 닷새 동안 내 몸에서 불을 지피고 있다. 처음 하루 이틀은 맑은 콧물로 살살 시작하더니 삼 일째부터는 목구멍에 붙어 내 숨통을 쥐락펴락한다.

 

지금은 온몸을 돌면서 뼛속까지 방망이 춤을 추고 있으니 혼곤(昏困)하다. 이놈도 나를 병원 가라고 유혹하고 있지만, 목에 수건을 감싸고, 꿀물에 모과차나 달여 마실망정 내가 병원을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도 한때는 이놈들이 들어오면 즉시로 병원을 찾아 애걸복걸했었다. 그렇다고 직방으로 내 치지는 못했지만, 이들에게도 내상은 입혔을 것이다.

 

감기는 약 먹으면 일주일, 안 먹으면 칠 일 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지만 내가 병원을 찾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감기란 놈이 근력 좋은 사람보다 나 같이 약골을 좋아하는데 그것이 내가 병원에 가지 않는 이유다. 나도 이제 약골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나도 한번 깡을 부리고 싶은 것이다.

 

작년에 왔으면 올해는 건너뛰면 좀 좋을까. 매년 겨울이 오는 길목이면 이들과의 싸움은 나의 연례행사가 된 지 오래고 어떤 운수 사나운 해는 노상 달고 살기도 했다.

 

남들은 감기라 하면 , 그거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마시면 금방이야. 깔아뭉개라고!” 하는 주제인데 어찌 병이랍시고 병원을 찾을까 보냐!

 

또 이들이 남한테는 병 같지도 않게 후하게 대하는데 유독 나에게만 악질로 나온다면야 나도 오기(傲氣)가 있지 너 좋을 대로 순순히 응하지는 못하겠다는 심산이다.

 

이들은 한때 콘택 600과 동업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아니까. 지금 이놈도 분명 독감이 아니고 감기라면 나는 끝까지 여유를 가질 것이다.

 

감기와 독감은 다르다. 사전(事典)에 독감을 <아주 독한 감기>라고 했으나 그건 정확한 말은 아니다. 독감과 감기는 종자도 다르고 치료법도 다르다.

 

내가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전문가에 의하면, 독감은 벼락같이 와서는 여차하면 사람의 목숨까지 노린다고 한다. 그러하니 독감이 오면 무조건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

 

그러나 감기는 사람의 생명을 노리지는 않는다. 또한 올 때도 전조(前兆)를 보이며 살짝 온다. 그래서 이들이 올 때쯤이면 오는구나, 하는 예감을 갖게 한다.

 

이번 놈도 나에게 온다는 신호를 주었다. 수일 전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고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밤에, 친구들과 내가 주옹(酒翁)을 앞에 두고 늦도록 씨름한 일이 있었다.

 

그때 한 줄기 차가운 기운이 가슴을 스치는 중에 나는 아스라이 이놈의 소리를 들었다. 하루 지날 때까지는 조용해서 이번에는 그냥 지나가나보다 했더니 그다음 날 기어이 코와 목을 간질거렸다.

 

사실 이놈들에 대한 나의 평상심은 그렇게 적대적이지는 않다. 좀 과장하면 필요악 같고 미운 친구 같다. 생활에 불편은 있지만 떨어진 내 면역력을 키워주고 부질없는 내 욕망을 내려주는 브레이크 같은 역할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이 좀 괴롭혀도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참았는데, 그것이 세월이 지나니 무의식으로 참는 편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며칠 시달리다 보면 생각이 자꾸만 흔들린다. 이놈을 당장에 요절내고 싶다. 이번 놈은 예전 어느 놈보다 인정머리가 없는 친구다.

 

마무리할 일이 많은 연말에 장기 투숙하고 있으니, 목이 타고 마음도 탄다. 목이 부어 밥을 넘길 수가 없으니, 정신까지 혼미하다. 가래 뱉고 코 푼다고 벌써 화장지 한 통을 다 비웠다. 이놈들이 아직도 제약회사와 동업 중인가.

 

나의 평상심이 이놈의 유혹과 길항(拮抗)하고 있다. 병원 갈 준비를 차리다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도로 주저앉았다. 먹고 있던 도라지 달인 물을 밀치고 이놈이 좋아(?)할 따끈따끈한 꿀물을 약 대신 마신다.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냉장고를 열어 나주 배도 큰 놈으로 하나 먹는다.

 

기운이 좀 나는듯하여 과제물 초안이나 잡아보자고 책상머리에 앉으려니 머리가 휘청거린다. 아직은 안 되겠다 싶어 도로 이불 밑으로 기어들었다.

 

한참 후 정신을 가다듬어 본다. 문득 감기가 시를 좋아한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났다. 마침 밖은 어둠이 깔리는 저녁이다. 며칠 문밖출입을 못 했더니 저녁 풍경이 그립다.

 

그래서 빼어 든 책이 이재무(1958~현재)저녁 6(이 시집 안에 몸살이라는 시가 내 마음 같아 특히 좋아한다)라는 시집이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두어 장 읽고 있는데 그만 눈이 빠질 듯이 아프다. 번지수를 잘 못 집었나? 할 수 없이 시집도 덮고 눈을 감으니, 문득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의 겨울은 감기가 없었다. 낮이면 <미나리꽝>에서 친구들이랑 썰매를 탔고 저녁이면 장작 타는 부엌에서 잔 고구마를 구워 먹었다. 그리고 밤엔 솜이불 속에 발을 찌르고 어머니의 옛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고향에 가고 싶다. 고향 가서 그 친구들과 소꿉놀이라도 하면 도시의 먼지가 털리기라도 하련만,…… 자꾸만 낯선 도시에서 방황하고 있다.

 

의식은 고향인데 무의식은 얄궂은 땅에서 헤매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의식이 무의식을 이기지 못하는 나의 의식이 오늘따라 참으로 불쌍하다. 불쌍한 의식을 생각하니 먹은 꿀물이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오늘도 무의식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린 하루였다. 2011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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