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옵는 은사님께>
은사님의 따뜻한 편지 감사합니다. 솔직히 편지를 보낼 때는 답장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친필을 대하니 마치 은사님을 마주 뵈옵는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의 치부가 부끄럽기도 하고 괜한 글을 올렸다는 후회도 됩니다.
저는 은사님의 서신을 받고 오늘까지 일주일 동안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선, 은사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문제 중에 왜? 제가 대학에 진학하려고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것은 비교적 간단한 문제였습니다.
제가 대학에 가려는 것은 월급을 많이 받아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고시에 합격하여 권력의 중심에 서서 저 혼자 호의호식하겠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겠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이 사회를 변화시켜 보고 싶습니다. 못 사는 농촌을 잘 살도록 하고 싶고, 빽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이 사회를 부수고 싶고, 돈보다 실력이 우대받는 사회를 만드는데, 한몫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이 문제가 아니라 대학원이나 외국 유학도 가고 싶습니다.
다음으로 사람은 왜 사느냐? 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인지? 태어났으니 그냥 사는 것인지? 아니면 전생의 업보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왕 태어났으니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꼭 학력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만,……,
세 번째는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라는 말씀 같은데 이게 결국 대학이냐 직장이냐 양자택일의 문제로 되돌아오고 마는군요. 제가 방학 내내 방구석에 틀어박혀 고민하는 문제 말입니다.
그동안 공부하면서 제법 많은 유형의 문제들을 풀어 봤습니다만 이렇게 오엑스문제가 어려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주 지겹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은사님. 그때가 생각납니다.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일입니다. 어느 날 지리산 어느 절 스님이 시주받으려고 우리 집에 왔습니다. 그 스님이 저를 보더니 어머니께 저를 달라고 했습니다.
절로 데려가서 잔심부름도 시키고 공부도 가르치고 싶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날 저는 무서워서 울었고 스님은 다음에 올 때까지 잘 생각해 보라며 길을 떠났습니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수심이 깊은 얼굴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공부도 시키지 못할 아들 절에나 보내 업보나 닦게 하고 싶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저는 어머니와 떨어져서는 살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후회됩니다. 그때 절로 들어갔더라면 지금 이런 고통은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은사님은 저에게 현실을 택하라고 하십니다만 저는 오엑스문제를 포기하고 지금이라도 중이 되고 싶습니다. 차라리 저 같은 놈은 처음부터 공부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니, 왜? 이런 가난뱅이 농사꾼의 집에서 태어났을까 후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은사님!
내일은 홀로 저 높은 웅석봉을 오를 계획입니다. 그곳 초입에는 아담한 절도 있습니다. 산에서 고민하겠습니다. 편지지가 다 되었습니다. 개학 때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69년. 1월 15일
신 상조 올림.
드디어 3학년, 새 학기가 되어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고민하다가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취업반으로 갈아타게 되었다. 은사님의 조언이 내 마음을 움직였음은 물론이었다.
선택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하지만 취직 공부가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3학년 1년 동안 잠도 적게 자는 등 준비에 전력을 다한 결과 농협이라는 조직의 입사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인생이나 다 그러하겠지만, 나는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는 출발 길에 들어섰다.
우리 모교의 경우, 전교 1등은 한국은행에, 2, 3등은 산업은행에 특별채용 되었다. 특별채용이란 무시험으로 채용되는 것을 말한다. 나의 공부가 그 정도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취업하려면 시험을 쳐야 했다.
참고로 내 고등학교의 성적을 보면, 1학년은 중간 정도(입학생 486명에 190등)에서 출발하여 졸업 때에는 13%(졸업생 473명에 63등) 정도였으니 영 엉터리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사실은 한참 후 내가 모 대학에 원서를 접수 시킬 때 학교 성적표를 확인하면서 알게 되었음을 첨언 한다.
농협 시험을 보게 된 것은 내가 농촌 출신으로서 평소 농촌사회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당시 농협 울주군 조합 전무로 계신 학교 대 선배님(엄도명, 26회 작고)께서 직접 오셔서 농협의 장점을 홍보하셨고,
한편 모교에는 취업보도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취업할 회사나 은행의 정보를 파악하여 학생들의 적성과 실력에 맞는 업체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취업보도실에 의하면 농협 입행 시험은 영어가 강하고 주산. 부기는 약하다는 분석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농촌 출신을 우대하려는 배려가 아닌가 한다. 나에게 적당하고 적합한 정보였다. 시골 중학교 출신인 나는 주산. 부기는 배우지 못했고, 대신 농업을 배웠다.
그해에 모교 재학생 이십여 명이 농협 시험에 응시했지만, 대부분이 영어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을 사후에 알게 되었다. 그만큼 영어가 어려웠다. 내가 진학반에서 영어 공부를 제법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해 합격한 재학생은 이호권 씨와 나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 후 이호권 씨는 타 은행으로 전직하여 농협 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당시 농협은 업무량이 과다하고 민원이 많이 불만이 많았었다. 현재도 이호권 동기는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각별한 사이다.
그렇게 하여 농협에 입행해서 정년 때까지 무사히 근무하게 되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다음 해에 농협에 입행한 동기들이 많은데, 예를 들면, 박수동. 박수덕. 전진수. 김일광. 최대옥. 최훈구. 이남칠 등, 이들 중에 최훈구 씨는 2020년 6월에, 이남칠 씨는 2021년 12월에 심장마비로 먼저 세상을 하직하였다.
아마 근무할 때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마침 두 분 모두 3학년 2반 나와는 같은 반 친구들이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면서 학창 시절을 회상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2-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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