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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보고>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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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석봉1 2024. 2. 1.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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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보고>

 

주지(周知)하다시피, 우리 모교는 1학년(이때는 진학. 취직 구분이 없다)을 마치고 2학년으로 올라가면 진학반과 취업반으로 나뉜다. 말 그대로 진학반은 대학에 진학하는 코스고, 취업반은 은행이나 기업체에 취업하는 코스다.

 

사실 우리 모교는 취업반이란 말을 쓰지 않고 사회반이라 하였다. 취업이라 하면 가난이 먼저 떠올라 불편하니, 아마도 학생들의 사기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1학년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진학반을 택했다. 취업보다는 아무래도 대학에서 깊이 있게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말하자면 연구 내지는 학구파라 할까, 그렇게 하여 2학년 때는 진학반인 6반에 편성되어 1년을 보냈다.

 

참고로 우리 모교는 한 학년이 여덟 개 학급이었는데 1반부터 5반까지는 취업반, 6~8반은 진학반이었다.

 

그런데 2학년 2학기 겨울 방학 직전에 3학년 선배들의 대학 진학을 살펴보니, 내 기준에는 상당히 부족하였다. 대부분 부산대 등 지방 대학이고 서울대는 합격자가 아예 없었으며, 연고대는 몇 명에 불과했다. 연세대에 전체 수석이 나왔다는 점은 특이하지만,

 

나는 실망한 나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교는 분기마다 시험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현관 앞 교무실 외벽에 성적순으로 게시하곤 했는데 내 이름도 이곳에 자주 올려지곤 했었다. 사회반 30, 진학반 20명 정도로 기억한다.

 

그런데 선배님들의 진학 성적이 부진하니 생각이 흔들렸다. 그래서 취업이냐 진학이냐?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내 처지를 담임 선생님께 설명하여 어떤 길이 좋겠는가를 자문(諮問)받기로 하고 편지를 올렸다.

 

답장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담임께서 답장을 주셨다. 은사님의 편지는 이사(移徙) 다니면서 잃었지만, 요지는 다음과 같다.

 

<신 상조 군에게>

 

군의 편지 잘 읽어 보았네. 금년에는 유난히도 추위가 심하이. 그곳뿐 아니라 이곳 부산에도 어제 10년 만에 눈이 내렸네. 눈이 내리니 겨울 맛이 나는지 사람들이 활발하군.

 

군의 편지를 받고 이틀 동안 고민 좀 했네. 내가 무슨 말로 군을 위로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결국 군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나 자신 무력감을 느끼네.

 

하지만 내가 군의 담임이기 이전에 인생의 선배로서 몇 말씀 하고자 하네. 우선, 지금까지 살아온 군의 삶을 높이 평가하네.

 

가난으로 중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군이, 산청에서 부산까지 명문인 우리 학교에 유학 왔다는 것 차체만으로도 대단하이. 늦었지만 축하하네.

 

이제 군의 고민에 대하여 말해 보겠네. 이번 방학이 끝나고 3학년에 올라가서도 계속 진학반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사회반으로 바꿀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지.

 

팔 남매의 장남(長男) 처지인 자네가, 우수한 성적임에도 가정 형편상 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니 스승으로서 안타까운 심정 그지없네.

 

하지만 군에게 묻겠네. 군이 대학에 가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을 확실히 하게. 왜 대학인가? 그다음으로 사람은 왜 사느냐? 라는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게.

 

그것부터 생각하고 그 생각 위에서 군의 진로를 결정하게. 그리고 사람은 이상을 가져야 하지만, 이상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도 말하고 싶네. 삶은 현실이니까.

 

만약 내가 군의 경우라면 나는 기꺼이 사회반으로 가겠네. 그리고 졸업하여 은행에 취업하겠네. 우리 학교 사회반 학생들 반 이상이 입행 시험에 합격하고 있지 않는가. 은행은 우리 선생들도 부러워하는 최고의 직장일세.

 

설사 군이 대학을 졸업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직장을 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네. 그것이 내가 사회반을 추천하는 이유일세. 너무 치사한가. 아닐세. 대학이 중요하다고? 아닐 것이네.

 

중요한 것은 공부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취업 이후라도 언제든지 기회는 올 것이네. 나는 군이 이 사실에 유념했으면 좋겠네.

 

군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가끔은 후회할 것이네. 나도 가끔은 후회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 전에 군처럼 많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일세.

 

상조 군, 가슴을 펴게. 군의 행운을 비네. 개학하면 만나세.

 

196915

2학년 담임 배 한권

 

 

*참고로 배 한권 선생님은 참으로 유능하고 인자하신 분이셨는데 3학년 때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는지 졸업 앨범에는 없었다. 그 후 은사님을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다. 변명하자면 공부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는 말 밖에는

 

은사님께서는 살아 계신다면 아마 100세쯤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당시 2학년 6반의 급우로는 노영환. 배영회. 이종호. 장재원. 황덕하. 황종태 등이 졸업 앨범에 보인다.

 

나는 은사님의 서신을 받고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답장을 올렸다. 2-1)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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