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都城) 걷기 계획서
퇴직하고 나니 더 바쁘다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백수(건달)가 과로사(過勞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겼나 보다. 요즘 나도 그런 심정에 처해있다.
내가 지리산 산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본심에는 세 가지의 사연이 깔려있었다. 첫째가 자녀 교육 문제였고 다음이 총수와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고 것이었고, 마지막이 6백 년 수도(首都)를 직접 체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울 이주 이유 중 두 가지는 해결했는데, 마지막 서울체험 여행은 마음뿐으로 언제나 우선순위에 밀렸다. 그것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미루고 미룬 결과이기도 하다.
퇴직하고도 한참이 흘렀다. 서울살이도 십 년이 훌쩍 넘겼다. 이제 언젠가는 서울을 떠나리라는 예감을 가지니 서울이 더욱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작심하고 하반기 생활계획을 <걸어서 서울 보기>로 정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급해진다. 6개월 동안에 어떻게 서울을 다 볼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는 충고한다. 그래, 서울 구경해서 뭐 할 건데? 시한 정해 다닐 게 뭐냐? 소일 삼아 쉬엄쉬엄 여행하면 되지. 옳으신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영 이룰 수 없다는 중압감이 들어서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도상연습(圖上演習)을 해 보았다. 인구 1천만이 넘는 비만한 도시. 한강에 놓인 다리만 해도 서른 개나 되고, 지하철이 9개 노선에 총길이가 317km나 되는 거대한 도시를 어떻게 다 보겠는가.
아무리 계산해도 무리다. 그래서 계획을 축소했다. 서울이 아니라 한성을 보기로 했다. 사실은 애초에 보고 싶은 게 그것이었는지 모른다.
한성이라는 지명은 통일 신라 시대에 <한산주>에서 <한양군>으로, 고려 태조 때 <양주>로 문종 때 <남경>으로 개칭하였고, 그 후 다시 <한양부>로, 태조 이성계가 개경(개성)에서 조선을 건국한 후 수도를 이전하면서 1395년 <한성부>로 명칭을 바꾼대서 비롯되었다.
물론 그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이라 하였다. 지금은 <서울>이다.
태조가 천도(遷都)할 때 왕궁의 배열을 놓고 개국 공신 간에 의견이 있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북악산을 좌청룡으로, 남산을 우백호로, 낙산을 안산으로 삼으라고 조언하였다.
만약 그렇지 않고 북악을 주산으로 하면 궁을 마주 보는 관악산의 기(氣)에 눌려 궁이 온전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옛날부터 제왕은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렸고, 동향(東向)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라고 하면서 극구 반대하여 무학의 주장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때 무학은 탄식하며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과연 200년 후에 큰 난리(임진왜란)가 일어나 왕궁이 불타고 국왕이 도망했으니, 무학이 옳았다는 의견이 많다.
결국 한성은 인왕산. 북악산. 남산. 낙산이라는 네 개의 산을 기점으로 하여 성을 쌓아 도읍의 면모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산 아래 네 곳에 사대문(四大門)을 세웠으니, 동대문이 <흥인문(興仁門)>이요, 서대문이 <돈의문(敦義門)>이고, 남대문이 <숭례문(崇禮門)>이며, 북대문이 <숙정문(肅靖門)>이다.
대문의 이름은 ‘유학에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를 따서 지은 것이다.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 사람은 어진 사람이 되어야 하며, 의리를 중요시하고, 예를 갖추며 지혜로워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북대문은 ‘꾀 정(靖)’ 자와 ‘슬기 지(智)’ 자가 뜻이 서로 통하므로 변화를 주기 위해 숙정문이라 지었다고 전하고, 풍수설에 북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가 침범하여 부녀자의 풍기가 문란해진다고 하여 문만 만들어 놓고 실제 사용하지는 않았다.
대신 숙정문보다 훨씬 뒤 서북쪽으로 홍지문을 내어 그 문으로 통행하게 하였다. 그래서 사실은 홍지문이 북대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인의예지신’은 완성되었다. 마지막 신(信)은 보신각을 말한다.
또한 사대문 사이로 네 개의 작은 문(小 대문)을 두어 백성들의 출입을 편안케 하였으니, 동소문이 혜화문(홍화문)이요, 서소문이 소의문(소덕문)이고, 남소문이 광희문(수구문)이고, 북소문이 창의문(자하문)이다.
따라서 한성을 출입하는 문이 총 여덟이라 이를 팔대문(八大門)이라 하니 복잡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팔대문 중에 유독 서대문과 서소문만 헐려서 흔적이 없다. 서쪽이 흉지(凶地)인지 아니면 의(義)를 상징하는 문이 무너져서 서울의 의가 무너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제 성안으로 들어가 보자. 가장 중요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은 곳이 궁궐이겠다. 한성 안에 다섯 개의 궁을 지었으니,
경복궁을 주궁으로 하여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경운궁)이 그들이다. 궁 다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공원이다. 한성의 3대 공원으로는 탑골공원. 사직공원. 삼청공원을 꼽는다.
그리고 박물관 네 곳(국립중앙박물관. 고궁박물관. 서울시 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과 인사동 문화지구. 북촌한옥마을. 남산골한옥마을. 청계천 물길을 추가하였다.
이 정도로 정리하니 산이 넷. 문이 여덟. 궁이 다섯. 공원이 셋. 박물관이 넷. 기타 유적지가 네 곳이니 총 스물여덟의 필수 답사길을 정할 수 있었다.
실행 순서는 우선 성곽을 한 바퀴 둘러본 후, 궁. 공원. 박물관. 유적지 순으로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여행하기로 하고 도상연습을 마무리하였다.
드디어 첫 출정을 하려는데, 일기예보에 의하면 장마가 계속될 것이라 한다. 그 좋은 봄날은 덧없이 흘려보내고 하필이면 장마 시작할 때 계획을 세우니 첫 주부터 차질이 났다.
다음날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 오라는 사람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데, 쓸데없는 장마까지 훼방을 놓으니 괜히 마음만 바쁘다. 나의 작은 소망인 <걸어서 한성 보기>가 성공할 수 있기를 꿈꾸면서 조선왕조실록을 뒤적거린다.
-2011년 7월 초 목동에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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