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도성에서의 환청>

잡문

by 웅석봉1 2024. 2. 25. 13:55

본문

 

도성(都城)에서의 환청(幻聽)

 

-진달래가 붉게 핀 화창한 어느 아침에 흰옷을 입는 많은 사람이 인왕산 성곽을 따라 오르고 있었다. 마치 개미 떼가 먹이를 찾아 모래언덕을 넘어가듯이 그 줄은 길게 이어졌다. 길 주위의 온 산에는 다홍의 무리가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푸르고 붉은 숲 사이로 외줄기 흰 띠의 움직임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것은 일제 강점 초기까지만 해도 봄이 되면 흔히 볼 수 있는 서울 도성의 풍경이었다. 이를 순성장거(巡城壯擧)라 하였다.

 

19165매일신보에서는 이 순성장거(巡城壯擧)에 대하여 특집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서 순성(巡城) 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예부터 신앙으로 발전하여 거사들이나 상인들을 비롯한 많은 백성이 성곽을 한 바퀴 돌면서 소원을 빌었다.’ 전한다.

 

정조 시대 실학자 유본예(柳本藝, 1777~1842)의 저서 한경지략(漢京識略)에도 순성(巡城) 놀이가 한성부 백성들이 즐겨하는 행사라고 소개하고 있으니, 도성은 처음부터 서울을 지키는 파수꾼이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과 애환을 함께한 생활공간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 서울 도성이 수년 전까지 금단의 땅이었다가 최근에야 개방되어 지금은 많은 시민이 그 길을 걷고 있다. 나도 십 년 넘게 서울에 살면서 도성을 한 번도 둘러보지 못하다가, 금 년 여름 깊은 장마 속에서 도성 답사계획을 세웠다.

 

세우면서 한성부의 주요 유적을 유유(悠悠)히 답사하는 호사를 누리겠다는 희망으로 가슴 부풀었었다. 오랫동안 미룬 일이었으니까.

 

옛사람들은 도성 길을 하루 만에 돌았다고 하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는 걸으면서 까마득한 옛것을 기억해 내고 싶었고 또 그 속의 사람들과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천천히 오래오래 걷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걸었다.

 

도성 길 사십 오리, 점점이 사연 없는 곳 있을까만, 그중에서도 나는 서소문에 올라 억울하게 귀양 간 조선 선비들을 위무(慰撫)하고 싶었고, 낙산에 누워서는 달동네 역사의 원조 격인 토막촌(土幕村)의 애환을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날이 암만 저물어도 오간수문에서 도망치는 꺽정이의 얼굴에 말 걸고 싶었고, 괴나리봇짐 지고 동대문 밑을 기어나가던 한 많은 낙방(落榜) 거사(居士)들과 시 한 수 나누고 싶었고, 당당한 남소문을 팔대문에 끼지 못하게 만든 도둑들의 속내를 듣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한숨을 돌려 태조가 호국신으로 제사 지낸 백악사(白岳祠)에 서서 절하고 싶었고, 무학이 궁궐의 주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인왕산에 올라 환생한 대사와 대화하고 싶었다.

 

남산 봉화대에 앉아서 서울의 야경을 보며 차 한 잔 마시는 여유는 한참 다음 일이고……,

 

둘러본 소감을 말할 차례인데 말문이 막힌다. 대강이야 짐작한 일이지만 충격이었다. 한마디로 도성의 도시 서울에 도성은 없었다.

 

서소문도 오간수문도 아무것도 거기에 없었다. 복원한다고 깃발 꽂은 지가 30년이 넘었다는데 아직도 흔적을 찾지 못한 구간이 많고 복원한 성곽도 도포에 베레모를 쓴 곳이 많으니 아니함만 못하다. 원형의 향기를 맡기는 어려웠다.

 

도성을 찾는 시민에 대한 배려도 부족했다. 복원된 곳이야 그렇다 치고, 찾지 못한 자리엔 상상의 그림판이라도 있었다면 방황하지는 않을 텐데……, 큰맘 먹고 길을 나선 백성들은 흔적 없는 도성을 찾는다고 안타까이 헤매고 있으니 이 무슨 낭패인가. 한성 장거, 그 시절이 차라리 그리웠다.

 

서울 도성,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던가! 태조는 엄동설한에 118천여 명의 백성을 지휘하여 조축(造築)하였고, 세종은 무려 32만여 명을 독려하여 수축(修築)하였다. 당시 한성 인구가 5만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그뿐인가. 축성 과정에 희생된 백성의 수가 세종 때만 일천여 명이 넘었다니 얼마나 급박하고도 피맺힌 대역사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축성 과정의 치밀함도 현대에 못지않다. 도성 전체를 아흔일곱 구간으로 나누어 전국의 고을마다 각 구간을 책임 축성케 하였다. 요즘 말로 바꾸면 국민 소통 사업이고 철저한 건축 실명제인 셈이다. 당시 석공의 각자(刻字)가 지금도 요소요소에서 다 떨어진 도성이나마 안타까이 지키고 있으니 이를 증명함이다.

 

축성 후의 보수 관리도 체계적이고 엄격하기는 축성 때와 다르지 않았다. 도성을 3개 구역으로 나누어 3 군문(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각각 책임 관리토록 하여 허물어진 성곽은 즉시로 수축하였다. 그 결과 도성은 반 천년이 넘도록 창연히 그곳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런 귀중한 문화유산이 을사늑약 점령군에 의하여 철저히 훼철되었고, 해방을 맞았지만, 정신없던 정권들이 개발이라는 탈을 쓰고 더욱 파괴하였고 때로는 방치하였다.

 

도성은 이미 많은 부분이 끊어진 채 버려진 상태에 있다. 마침 서울시장이 바뀌었으니 기대한다. 시장관사가 도성의 성곽을 깔아뭉개고 앉아있다. 먼저 그것부터 시민에게 돌려주길 바란다.

 

도성을 걷는 동안 나도 그들처럼 만신창이가 되었다. 성곽의 돌덩이 하나하나가 원귀의 눈이 되어 나를 노려보았고, 44만 석공의 추운 얼굴이 거기에 겹쳤다. 특히나 이빨 빠진 곳의 돌덩이들은 나를 소름 돋게 했다. 그들은 성곽에서 튀어나와 내 몸을 물고 놓아주질 않았다. 팔각정의 많은 외국 관광객이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저쪽 주차장 축대에서 왕따당하는 말라깽이 우리 아부지. 이쪽 시궁창에 물막이가 되어, 팅팅 불어 터진 외팔이 우리 삼촌,

 

저어~기 저, 빵빵거리는 찻길 밑에 깔려 신음하는 우리 늙은 할아배들……, 제발 좀 제자리에 앉혀주오. 당신만 믿소. - 도성을 걷는 동안 환청들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지금도 쟁쟁하다.

이 글은 20117<도성 걷기 계획>에 의거 1차로 성곽을 걷고 난 후기다. -.

 

 

'잡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命)수필과 명(名)수필>  (3) 2024.03.22
<친구 주옹을 찬양하며>  (1) 2024.03.06
<도성 걷기 계획서>  (2) 2024.02.24
<감기가 그린 자화상>  (3) 2024.02.18
<여자의 일생>  (3) 2024.02.11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