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북한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당시 남북 간의 현실을 감안(勘案)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보면 민족의 장래는 생각지 않고 권력욕에 빠져있었거나 아니면 공산주의에 이길 자신이 없는 나약한 귀족주의자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아니면 강대국의 압력이 있었거나……,
김구 선생은 민족주의자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요 사상가이며 또한 지극한 효자였다. 그는 아버님의 임종 전에 어머니 몰래 허벅지 살을 스스로 떼어내어, 살은 꾸어서 고기로, 피는 약으로 드시게 하였다.
그런 정성도 부족하여 좀 더 큰 살점을 떼어내려고 다리에 칼을 대었으나, 의지가 부족하여 살을 도려내지 못하자 불효자라고 한탄하였으니, 과연 효(孝)란 어떠해야 하는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선생의 인생 역정은 한 편의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그의 선조는 본디 안동 김씨로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후손이며 왕이 고려 태조 왕건의 부마가 되었으니, 고려에서는 귀족의 가문이었다.
조선에서도 양반으로 살아오다가 조선 중기 <김자점(1588~1651)의 옥,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자점의 역모로 일어난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멸문지화를 당하고, 한양에서 황해도로 옮겨 살게 되면서 출신을 속이고 족보 없는 상놈이 되었다.
그러나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들의 교육열과 양반이 되어야 한다는 선생 자신의 의지에 따라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7세 때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과거장에서의 부정과 매관매직의 세태에 회의를 느껴 이후 과거 공부는 접고 관상과 풍수에 탐닉(耽溺)했으며, 가문의 어린이를 모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 후 동학에 입도하여 접주로도 활약하였고,
1896년 3월 9일 아침 7시경에 <치하포(황해도 안악군 소재)>의 한 주막에서 명성황후 시해 범인으로 지목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맨손으로 죽인 죄로 투옥되었다가 23세에 탈옥하여 마곡사의 중이 되었다.
28세 때 아버님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고, 29세에는 최준례 (1889~1924)와 결혼, 이후 교회 활동과 교육사업 그리고 항일운동에 투신하다가,
1911년 그의 나이 36세 때에 안악사건(서간도에 무관학교 설립을 위하여 자금을 모금하다가 민병찬의 밀고로 황해도 신천에서 관련 인사 160명이 함께 검거된 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는다. -계속-
<걷는 사람 하정우> (2~1) (3) | 2023.11.07 |
---|---|
<백범 일지>에 담긴 사상(3~3) (1) | 2023.11.06 |
<백범 일지>에 담긴 사상(3~1) (1) | 2023.11.04 |
<정의란 무엇인가>에 정의는 없었다(3-3) (1) | 2023.11.03 |
<정의란 무엇인가>에 정의는 없다(3-2) (2) | 2023.11.02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