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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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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석봉1 2023. 11. 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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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나는 평소 맛집 탐방 다니길 좋아한다. 어떤 식당에 갔는데 그 집 음식에 놀라운 맛이 숨어 있으면 반드시 사장님에게 비법을 물어본다. 귀띔해 주시면 집에 와서 그대로 따라 해본다.

 

최근에는 어느 전라도 식당에서 미역국을 먹었는데, 엄청나게 구수하면서도 감칠맛이 났다. 미역국은 끓이면 끓일수록 맛있어진다는데 오랫동안 푹 끓이면 이런 맛이 나는 걸까?

 

사장님께 물었더니 그게 아니었다. 비밀은 쌀뜨물에 있었다. 쌀뜨물로 끓인 미역국은 곡물에서 배어난 고소한 맛이 해산물과 고기를 휘감아서, 한 차원 다른 국으로 업그레이드해 준다. 이런 식으로 알게 된 비법이 하나 더 있다.

 

-중략- 집에서 북엇국을 직접 만들면 왜인지 사골국물처럼 뽀얀 국물이, 우러나오지 않았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요리조리 끓여 보다가 결국 사장님께 직접 물어보았다. 북엇국 맛집의 비밀병기는 들기름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바로 짝태(명태의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내고 소금에 절여서 넓적하게 바람으로 건조시킨 것)로 실험을 해보았다. -중략- 이때 주의할 사항은 물을 한 번에 들입다 붓지 않아야 한다는 것. 물을 조금씩 추가하면서 끓여야 한다.

 

약간만 붓고 바르르 끓으면 또 물을 붓고, 다시 한소끔 끓으면 물을 추가한다. 이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국물이 뽀얗게 올라온다. 여기에 김치를 넣으면 김치 북엇국이 되고, 계란을 풀면 구수한 계란 북엇국이 되는 것이다.

 

-중략- 처음에는 이런 디테일 한 조리를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걷기와 마찬가지로 요리도 한번 해보면 일종의 관성이 붙어서 계속하게 된다. 내가 먹는 밥에 나의 시간을 들이는 일은 짐작보다 훨씬 충만한 일이다.

 

걷는 사람, 하정우문학동네. 146쪽에서 148.

 

 

끝이 안 보이는 머나먼 길을 말할 때 흔히 천릿길이라 표현하는데, 천 리를 오늘날의 단위로 계산하면 약 392km. 서울에서 우리의 목적지 해남까지는 577km, 우리의 국토대장정은 천릿길 보다 훨씬 더 먼 길이었다.

 

서울에서 해남까지 내 두 다리로 꼭꼭 밟아 걸어간다면 이전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얼마나 많이 눈에 들어올까? 내 체력의 한계는 어느 정도일까? 몸 상태와 컨디션이 각기 다른 열여섯 사람의 친구들이 오직 서로에게 의지하고 기대며 그 머나먼 길을 걷다 보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만만치 않은 그 시간을 견디고 나면, 이제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동이 뒤따를 것이라는 생각이다. 또 그렇게 도착한 땅끝마을의 풍경 역시 무척 낭만적이고 아름다우리라 기대했다.

 

그랬는데……,수많은 소동과 사건 끝에 국토대장정을 마치고 뒤풀이하던 날, 이상하게도 나는 그저 무기력하고 허무했다. 그냥 그 여정이 너무나 피곤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중략-

 

정작 왜 나는 텅 빈 듯한 기분이 들었을까? 보람이나 희열 같은 감정이 따라와야 하는 게 아닌가? -중략-

 

그 후 며칠간 꼬박 앓듯이 잤다. 밖에 나가지도 않고 태아처럼 웅크린 채 계속 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꿈인 듯 생시인 듯 자꾸만 길 위에서 일어난 일들이 눈앞에 보였다. 내가 걸었던 길. 동행한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종일 걸었던 어느 하루, 산뜻한 아침 공기. 내 등을 달궈주던 햇살부터 걸은 뒤 느꼈던 기분과 감정까지 생생히 되살아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억들은 희미해지긴커녕 쏟아질 듯 내게 달려들었다.

 

길 끝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길 위에서 우리가 쌓은 추억과 순간들은 내 몸과 마음에 달라붙어 일상까지 따라와 있었다. 그 후 밖에 나갔다가 희한하게도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보더니 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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