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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광야>

시평

by 웅석봉1 2023. 10. 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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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曠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보해 휘날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끈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시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시인의 <광야> 전문.

 

<공주야(公主野)>

 

까마득한 날에/ 이 몸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어디 애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남자들이/ 이 몸을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내 콧대를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프러포즈를/ 더없이 높은 콧대가 번번이 물리치고/ 고칠 수 없는 공주병이 솔로의 길을 열었다//

 

지금 수많은 연인들 속에/ 이 몸 홀로 고고하니/ 내 여기 외로운 고독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왕자가 있어/ 이 공주에게 홀딱 반하게 하리라//

 

패러디 시인의 <공주야(公主野)> 전문

 

<시인 해설>

 

이육사(1904~1944. 본명 원록) 시인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안동 도산 보통학교와 대구 교남(嶠南) 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㤠團)에 가입하였다.

 

1926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 학교에 입학하였고, 1927년 귀국하여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수인 번호가 264번으로 그 번호로 호를 육사라 지었다.

 

출옥 후에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수학 중에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한다.

 

19334<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 후 7월경에 귀국하여 시 황혼(黃昏)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등장한다. 이후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한다.

 

19343월 그의 의열단 및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7월에야 간신히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37년 김광균. 윤곤강 등과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하고, 그 무렵 유명한 노정기(路程記),교목(喬木), 청포도(靑葡萄)」 「광야(曠野), 절정(絶頂)등을 발표한다.

 

19435월 큰형의 소상을 위해 일시 귀국했다가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애석하게도 옥사한다.

 

이육사가 죽은 후, 1년 뒤에 해방이 되고 1946년 신석초를 비롯한 문학인들이 유고 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하였다.

 

그의 유해는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으나 이후 1960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로 이장했다. 1968년 그의 시비(陸史詩碑)가 건립되었고, 2004년 문학관도 세워졌다.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 금관문화훈장 추서되었다. 그는 윤동주와 함께 대표적 항일 저항 시인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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