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에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노천명 시인의 <사슴> 전문,
<착각>
다리가 길어서 늘씬한 여자여/ 언제나 자랑스러운 듯 교만하구나/ 키가 큰 너는 원래 기린 족속이었나 보다//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들여다보고/ 모델 하면 돈 많이 벌겠다는 말 생각해 내고는/ 자기도취의 만족감에 기쁜 표정을 하고/ 빈말이란 걸 모른 채/ 어설프게 한 번 스텝을 밟아 본다.//
패러디 시인의 <착각> 전문,
<장날>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루 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위로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노천명의 <장날> 전문.
<앞날>
카드를 긁어 비싼 골프채를 샀다/ 필드에 나가 운동을 마치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차츰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마누라 얼굴이 눈앞에 클로즈업되고/ 카드 대금 청구서가 집으로 날아오는 날에/ 마누라에게 추궁당할 생각을 하니/ 뿌듯함보다 먼저 오금이 저렸다//
패러디 시인의 <앞날> 전문.
<작가 소개>
노천명(1912년~1957년. 본명은 ‘기명’이었으나 어렸을 적에 병치레가 많아 천명으로 개명함) 시인은 황해도 장연군 출신으로 진명여자고등학교와 이화 여자 전문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조선중앙일보에 입사, 기자로 4년간 근무하면서 시 「사슴」을 발표한다.
1938년 조선일보 기자로 전직하여, 조선일보 자매지인 여성지의 편집인이 된다.
1942년 친일 문화 단체인 ‘조선 문인 협회’에 가입하여, 전쟁을 찬양하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선동하는 시를 발표한다.
1943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전직하여 문화부 기자가 되어 「승전의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노래하자 이날을」, 「흰 비둘기를 날리며」 등 다수의 친일 시를 발표한다.
노천명의 대표 친일 시로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로 시작되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는 가히 친일의 절정이었다.
시인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최정희. 모윤숙과는 친숙한 사이로, 세 사람 모두 일제의 우리 문인 회유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가입(1942년)한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1950년 6·25 전쟁 때는 미처 피난치 못해 서울에 남아서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학인 총궐기 대회’에 참가하는 등 좌익 활동을 한다.
서울 수복 후에는 좌익분자로 몰려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나 문인들의 도움으로 몇 개월 만에 사면된다.
그 후 공보실 중앙방송국에 촉탁으로 임명되기도 한다. 이어 무리한 집필 활동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1957년에 아까운 나이에 뇌빈혈로 사망한다.
*사슴- 이상이 높아서 슬픈 사람아, 언제나 점잖은 척 말이 없구나. 뿔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이나 귀한 존재였나보다. 화려했던 과거가 되새겨져서, 향수에 젖어 옛 추억을 더듬어 보노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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