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의 <향수>
<작가 소개>
정지용(1902년~1950년)은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1918년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동인지 《요람》을 발간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는 교내 시위를 주동하다가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다. (*이 대목에서 애통하다)
1919년 창간된 월간 종합지 《서광》에 「3인」이라는 소설을 발표함.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1923년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다니면서 1926년 《학조》 창간호에 시 「카페·프란스」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함.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휘문고보 교사로 부임하여 해방될 때까지 재임함.
1930년 《시문학》을 발간하고, 1933년에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며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함. 1935년 첫 시집인 『정지용 시집』을 출간하였고, 1939년부터는 시뿐 아니라 평론과 기행문 등도 활발히 발표함.
1941년에는 두 번째 시집인 『백록담』을 발간한 후 한동안 은거하면서 작품활동을 중단함.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가 되어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였고, <경향신문> 편집주간으로 활동하기도 함. 1946년 시집 『지용 시선』을 발간함.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화여대 교수를 사임하고 은평구 녹번동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문학독본』을 출간함.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됨. 이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1950년 9월 평양에서 타계함.
분단 이후 오랜 기간 그의 시들은 다른 납북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1988년에야 해금되어 대중에게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어 오늘에 이름. 1995년에는 그의 대표작 <향수>가 가요로 만들어져 발표되기도 했다.
그의 모교인 일본 도시샤대학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동 대학을 졸업한 윤동주 시인과 함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항일 운동을 한 인물을 일본에서 기념하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교토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이곳을 즐겨 찾기도 한다.
출생지인 충북 옥천에서는 시인을 기념하는 <지용문화제(祭)>가 매년 개최되고 <지용 문학상>도 시상하고 있으며 옥천역에는 그의 시비가 있다.
정지용의 시에서 <향수>라는 단어는 비단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표현할 뿐만이 아니라 비관적인 현실 인식과 인간적인 비애까지 숨어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뜬구름 같은 것이니……, 문학인은 문학으로만 경제인은 경제로만 그 사람을 평가해야 하거늘……, 살아가면서 이념의 자유이니 사상의 자유이니……, 다투지 말자는 뜻이리라……, 현 세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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