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 전문.
<소주와 양주>
서민의 부름을 받고/ 소주병은 고급 안주의 생애와/ 룸살롱으로 떠난 양주병의 치사함을 이야기한다/ 양주병은 서민을 버리고 그저 매상만을 생각하며/ 룸살롱으로 떠났다.//
병 모양만 다를 뿐이다, 내용물은 거기서 거기다/ 그러한 잠시 소주병이 알던 양주병은/ 목에 힘을 준 사람들 앞에서 아양을 떨고/ 삼겹살이 익고 소주잔이 돌아가고/ 참이슬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테이블 밑 쓰레기통에 몰래 버려지는 양주의 위선은 보이지 않는다//
술은 마시면 취하는 것/ 한때는 도수를 높였다 내리고/ 이제 소주병은 즐거워해야 한다/ 돌판 위에 구워지는 삼겹살 냄새를 맡으며/ 만족해하는 서민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고급 안주 옆에/ 소중히 놓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서민의 애환과 주머니 사정을 위하여/ 소주병은 증류주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
양주병이 대접받든 말든/ 그저 후리 삼배의 의식을 붙잡고/ 소주병은 양주병의 값비쌈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언제나 부담 없는 안주와 함께/ 술꾼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알코올은 인간의 피와 살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덮어쓴 위선의 껍데기를 벗길 때/ 한 몫 거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을/ 한탄할 그 무엇이 서러워서/ 양주병을 부러워하는 것일까?//
양주병은 룸살롱에 있고/ 폭탄주를 돌리거나 말거나/ 서민의 사랑은/ 소주병의 매끈한 몸매를 쓰다듬는데.//
패러디 시인의 <소주와 양주> 전문.
<시인 소개>
박인환(1926~1956) 시인은 50년대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시인이다. 시인은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하여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친의 강요로 평양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15 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함.
이후 서울로 내려와 종로에서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운영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하고, 1949년 5인 합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 기수가 되었다.
1955년 『박인환 시선집』을 간행하였고 1956년 소설가 <이상>의 기일(忌日) 때 3일간의 폭음으로 급성 아르콜 중독성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요절함(향년 29세), 묘소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76년 『목마와 숙녀』가 유고 시집으로 간행됨.
*시인의 대표작 <목마와 숙녀>에서 버지니아 울프(1882년~1941년)는 20세기 영국의 모더니즘 여류작가(소설가)로 한 많은 삶을 살았으며,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투신자살했다. 그녀의 대표작으로 『항해』, 『밤과 낮』, 『댈러웨이 부인』, 『등대』, 『올랜도』 등이 있다.
*패러디 시인(박영만)은 1958년 충북 제천에서 출생하여 상지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오랜 연단과 출판 관계 생활을 거쳐 현재 드림북코리아, 프리월출판사 대표로 재직 중이며, 지은 책으로는 《인생 열전》, 《깨달음의 중심에 너를 세워라》, 《에피소드와 함께 읽는 세계 명작 다이제스트》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칼리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 예수》, O, 헨리 단편 편역 집 《나는 우울할 때 O, 헨리를 읽는다》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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