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전문.
<10Kg을 빼기까지는>
10Kg을 빼기까지는/ 나는 아직 다이어트를 계속할 테요/ 체중계의 숫자가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살을 여윈 기쁨에 잠길 테요//
어느 일요일, 오랜만에 옷장을 여는 날/ 옷들이 너무 커서 못 입게 되어버리고/ 천지에 뱃살은 자취도 없어지고/ 놀랍도록 가늘어진 허리 개미마저 시샘하느니//
끝내 안 빠지면 그뿐/ 기쁨은 상상에 그치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10Kg을 빼기까지는/ 나는 아직 다이어트를 계속할 테요/ 찬란한 슬픔의 살빼기를.//
패러디 시인의 <10Kg을 빼기까지는> 전문.
<시인 소개>
김영랑(본명은 윤식) 시인(1903년~1950년)은 전남 강진에서 출생하여 1935년 <영랑 시집>으로 등단.
1919년 휘문의숙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 고향으로 내려옴. 고향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던 중에, 강진경찰서에 체포 구금되어, 4월 5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4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는, 불온한 언동을 한 사실은 인정되나 실행하지 않았다는 정상참작으로 무죄 석방, 6월 9일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으로 무죄 확정됨.
이후 1920년 일본으로 유학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영문과에 수학하다가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는데 이런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하여 한국인들을 말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일본에 환멸을 느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함.
유학 중에 아나키스트 혁명가인 박열과 교류하기도 하고 괴테. 키츠 등 외국 문학에 심취하기도 함.
1930년 정지용. 박용철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함.
해방 후에 보수파 정치인으로 정계 입문하고 1945년 강진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여 대동청년단지단장에 취임하였으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성향에 질려 사임,
그 후 이승만 정권하에 출판국장을 하다가 무질서한 시국과 이승만의 독재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억압을 일삼는 ‘간판만 바꾼’ 친일파의 행각에 환멸을 느껴 6개월 만에 사임.
그 후 서울 수복 다음 날인 1950년 9월 29일에 북한군이 쏜 유탄에 맞고 그 자리에서 사망함. 2008년 금관문화훈장. 2018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펴낸 시집으로 『영랑시집』, 『영랑시선』 두 권이 있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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