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절판
당신이 오신다는 전갈에/ 마음이 먼저 오색 꽃밭입니다/ 음양을 맞추고 오미를 갖추어/ 가장 귀하고 어여쁜 것만 골라/ 열은 꽉 차니 피하고 과불급이라/ 행운의 아홉수로 당신을 모십니다/
구차한 이야길랑 모란꽃 수놓은 자개로 덮사오니/ 속살 같은 밀전병 위에 오방색 구름만 얹으셔요/ 구구하고 절절한 화심花心을 보름달로 쌈 싸드릴게요//
『대지』의 소설가 펼벅 여사가 구절판 나전칠기 뚜껑에 놀라/ 고 열어보고 또 넋을 놓았다지요 망가진다고 젓가락 들지 못/ 했다지요 창경궁 옆에 살던 이모는 몸매도 봄볕 같았지만 음/
식 솜씨 역시나 메구여서 버릴 것 없는 여자라고 했는데 몸 약/ 한 이모부가 혈색 좋은 국악원 선생인 친구를 부르는 날이면/ 두 볼 바알개져서는 밤새워 자로 잰 듯 채치고 볶는 참기름 냄/
새로 달빛 언저리를 밤 이슥토록 매끌댔어요 피리 선생 젓가/ 락 들지 못하고 피리만 불었어요 보일 듯 말 듯 했던 화심에 이/ 모가 꽃뚜껑을 덮는 밤이었어요//
김유선 시인의 <구절판> 전문.
<어설픈 해설>
열 개는 꽉 차니 피하고 과유불급이라, 행운의 아홉수로 당신을 모십니다. 나무 상자 하나에 구분하는 칸이 아홉이라, 그래서 구절판이라네요.
구차한 이야기는 모란꽃 수놓은 자개로 덮사오니, 속살 같은 중앙의 밀전병 위에 주위의 팔방에는 오방색 구름만 얹으셔요, 구구하고 절절한 꽃 마음을 보름달로 쌈 싸 먹어요.
소설 『대지』의 저자 펄벅 여사가 구절판 나전칠기 뚜껑에 놀라고 열어보고 또 넋을 놓았다지요, 망가진다고 젓가락도 들지 못했다지요. 얼마나 귀여웠으면 그리 아꼈을까요.
창경궁 옆집 이모는 봄볕 같은 몸매에, 음식 솜씨는 귀신이라 버릴 것 없는 여자지요. 몸이 약한 이모부가 혈색 좋은 국악원 선생인 친구를 부르는 날이면 두 볼이 빨개져서는 밤새워 노닥거리고, ……, 구절판을 부치고.
피리 선생은 젓가락도 들지 못하고, 피리만 불어댔지요. 보일 듯 말 듯 했던 꽃분이 이모가 꽃뚜껑을 덮는 밤이었어요.
당신이 오신다는 전갈에, 마음이 먼저 꽃밭이었어요. 음양을 가다듬고 오미를 돌려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고……, 구절판을 부치면서…
김유선 시인(1950~2019년)은 경기도 용인 출생으로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한 문학박사로 198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장안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시집으로 『놓친마음찾기』, 『빈집』 등이 있으며, 저서로 『춘원시연구』, 『현대시연구의 방법론적 실제』 등이 있고, 천상병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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