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경왕후(端敬王后)
단경(1487~1557)은 장수하셨다.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서 종심소욕(從心所欲)의 수(壽)를 넘긴 왕후는 한 손안에 불과하다. 지금 나이로 상상하면 백수와 같다. 온실의 화초야 오래 필 수 있다지만 초야에 버려진 꽃이야 한 바람에 가는 것을, 명이 길어도 참으로 길었다.
7년 조강지처(糟糠之妻)에, 7일 중전에 방년 20세인 그분이, 그렇게 한이 많은 그분이, 어찌 그리도 오래 견딜 수 있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양로왕(養老王:연산)은 포악하고 무기력했다는데, 포악하다는 말은 그를 밀어낸 사람들이 쓴 역사이니 믿기에 두렵지만, 무기력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연산이 밀려나던 날이 별빛도 없는 9월 초이튿날 밤이던가, 야밤인데 침전에 침입한 세 명의 난신(亂臣)에게 그 흔한 <무엄하구나!> 하는 호령 한 번 못한 채 옥쇄를 넘긴 것이나,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그 겨울도 못 견디고 숨을 거둔 것이나, 그는 역시 강단이 없었다.
옥쇄를 강탈한 폭도들은 진성대군의 잠저(潛邸)로 말을 몰았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진성은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온 줄 알고 자결코자 하였다. 그때 부인은 대군과는 달리 침착하고 당당했다. 집사를 불러 한마디로 명했다. ‘저들이 타고 온 말의 머리를 보고 오너라.’
돌아온 집사의 입에서 ‘말의 꼬리가 대문을 향하고 있습니다’하는 보고받은 부인은 대군을 일으켜 세우며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옹립하러 온 것이오’ 하자 진성은 부인을 우러러보았다.
다음날 진성대군은 보위에 올랐지만, 그는 마음대로 나라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아직은 힘이 부족했다. 반정 공신들의 의견에 따라, 왕은 어쩔 수 없이 부인을 내쳤다. 결국 부인은 역적의 딸이 되어 궁을 떠났다. 반정 모의에 반대하여 죽임을 당한 좌의정 신수근이 부인의 아비였기 때문이다.
사위를 왕으로 모신다는데 어느 장인이 반대하겠는가. 이유는 불사이군(不思二君), 지조였다. 훗날 영조는 신수근에게 ‘고금동충(古今同忠)’ 네 글자를 하사하면서 ‘신수근은 정 포은(몽주)과 더불어 충의가 같다. 호조에 명하노니, 사우를 만들어 주고 그 곁에 각(閣)을 세워 이를 새겨서 걸라’ 하였다. 그 각이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지금도 그대로 서 있다.
진성이 왕위에 오른 지 꼭 일주일 후 부인은 경복궁을 떠났다. 그날 궁 안의 사람들은 물론이요, 부인이 걸어 나온 건춘문의 문풍지도 서러워 울었을 것이다. 충신을 역적으로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출가외인인 딸을 폐서인하니 그것이 조강지처에 대한 예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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