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을 나선 부인은 인왕산 아래 세조의 사위이자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의 아래채에서 그 가을을 지낸다. 들려오는 소문에, 왕이 이쪽을 바라보고 부인을 그리워한다기에 부인은 이를 애절히 여겨 인왕산 바위에 다홍치마를 내걸어 왕을 위로했다고 한다.
또한 왕은 사신이나 사직단을 핑계 삼아 인왕산 근처에 자주 머물렀고, 그때마다 그의 말(馬)을 부인에게 보냈고 부인은 말에게 죽을 끓어 먹였다고 한다. 어떤 때는 왕이 남몰래 만나고 싶어 한다기에 부인은 임금의 예가 아니라며 타일렀다고도 전한다.
그렇게 다정하던 왕도 얼마 후 후궁이던 대윤(윤임)의 여동생을 중전 자리에 앉혔고 이후는 부인을 잊은듯했다. 계비 윤 씨도 그렇게 복이 많지는 않았는지 왕후가 된 지 10년 차에, 아들(인종)을 낳다가 산후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꽃다운 스물다섯이었다. 처복 많은(?) 진성에게 또 한 번의 중전 자리가 비게 되었다.
그러자, 그해 삼복더위 속의 어느 날, 순창 고을 강천산 정자 위에 세 선비가 비장히 앉았다. 그들은 관인(官印)을 소나무에 건 채 죽음을 각오하고 <신비 복위 상소문>을 지었다. 왕비를 새로 간택하지 말고 폐비를 복원시키라는 상소였다. 상소문은 논리가 정연하고 충의가 절절하였다.
하지만 상소를 올린 담양 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은 결국 사악한 무리로 몰려 귀양을 떠난다. 그 자리에 무안 현감 유옥이 함께했으나 그는 봉양할 부모님이 걸려 상소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해 화를 면했다. 이 사건이 기묘사화의 발단이 되었고 그래서 이들을 기묘 삼현(三賢)으로 불린다.
영조 때 순창 유생들이 이들을 기리는 비각(三印臺)을 세우자 임금도 찬양문을 지어 내려보냈다. 다음 임금도 어제문(御製文)을 지어 붙였다. ‘삼인기대(三印其臺) 만고불인(萬古不隣)이라 하였으니 그 정신은 만고에 일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상소를 올린 시기에 맞춰 매년 추모제가 그곳에서 열리고 있다.
조강지처를 버린 죄를 씻을 절호의 기회를 왕은 스스로 외면했다. 그런 왕이 그의 나이 57세 되는 어느 초겨울 밤에 부인을 유언처럼 불렀다. 그는 이미 수족은커녕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부인의 손을 잡은 왕의 두 눈엔 안개가 자욱하고 폐비의 한 손에는 까만 염주 알이 구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수일 후 왕은 세상을 떠났다.
그날 밤 장흥 절 골로 돌아온 폐비는 이후 한 번도 사문을 나오지 않았다. 그곳에서 23년을 더 사신 부인은 눈 내리는 밤에 잠자듯 돌아가셨다. 그때까지 부인은 왕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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