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김삿갓》 227
김삿갓은 냉정(冷靜)을 되찾으며,
<인생(人生)은 초로(草露)와 같다고 했으니,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누가 알겠소이까, 아무튼 운명(殞命)한 지 사흘이나 지났다고 하니, 이제는 염습(殮襲)하여 장사(葬事) 지낼 차비(差備)를, 해야 하오, 이러고 있으면 시체(屍體)가 부패(腐敗)해서 큰일 난다오,>
그리고 이번에는 노파(老婆)의 몸을 잡아 일으키며 이렇게 달랬다.
<그만 고정하시고 수의(壽衣)와 제수(祭需) 준비를 하도록 하십시오,>
이윽고 노파(老婆)가 울면서 수의(壽衣)와 제주(祭酒)를 가져오는데, 수의(壽衣)라는 것은 시집올, 때에 입었던 녹의홍상(綠衣紅裳)이었고, 제주(祭酒)라는 것은 초례(醮禮) 때에 쓰다 남은 바로 그 술(酒)이었다.
그다음 날, 멀고 가까운 마을에서 문상객(問喪客)들이 몇 사람 모여 와서 장사(葬事)를 치르게 되었다.
상여(喪輿)를 모시고 집 밖으로 나오니, 공교롭게도 마당 가에는 복사꽃이 곱게 피어 있었고, 무심한 제비들은 쌍쌍(雙雙)이 즐겁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장모(丈母)는 상여(喪輿) 채를 붙잡고 따라오며 슬픈 넋두리를 계속한다.
<아이고, 아이고, 내 딸이 죽다니! 맘씨도 곱고 재주도 많은 아이였는데 아이고, 아이고, 내 딸이 죽다니!>
김삿갓은 그 광경(光景)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즉석(卽席)에서 다음과 같은 만장(輓章)을 한 수 써 갈겼다.
우하만야별하최(遇何晩也別何催), 미복기흔지복애(未卜其欣只卜哀),
제주유여초일양(祭酒惟餘醮日釀), 습의잉용가시재(襲衣仍用嫁時裁),
*해석하면,
만나기도 늦었는데 이별이 왜 급한고, 기쁨은 못 누리고 슬프기만 하구나.
제상에 부은 술은 혼인 때의 술이요, 수의로 입은 옷은 시집올 때 옷이네.
창전구종소도발(窓前舊種少桃發), 렴외신소쌍연래(簾外新巢雙燕來),
현부즉종처모문(賢否卽從妻母問), 기언오녀덕겸재(其言吾女德兼才),
*해석하면,
창가엔 복사꽃 간간이 피어 있고, 발 넘어 둥우리엔 제비가 나는데.
딸의 성품 어떠냐고 장모에게 물으니, 재주는 그만이라, 울면서 대답하네.
사람이 죽고 나면 내세(來世)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김삿갓은 아직 그것을 모른다.
만약 내세(來世)라는, 것이 있다면, 시집온 지 열흘도 못 돼 죽어 버린 새색시의 깨끗한 넋은 반드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갔으리라고 김삿갓은 굳게 믿고 싶었다.
아무튼 김삿갓은 아무 연고(緣故)도 없는 남의 집 장사(葬事)를 치러 주느라고 이틀씩이나 길을 지체(遲滯)하다가, 사흘 만에야 다시 나그네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날따라 인생(人生)이 허무(虛無)하기 그지없게 여겨져서, 김삿갓은 하늘가에 떠돌아가는 한 조각 구름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해석하면,
생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의 구름이 스러짐이다.
철령(鐵嶺)에서 단발령(斷髮嶺)으로 가는 산길은 아직도 멀고 험난(險難)하였다. 20리가 넘는 고개 하나를 넘고 나니, 어느새 해가 한낮을 지나 배(腹)가 출출해 오기 시작하였다.
-이 부근에 주막(酒幕)이 있으면 안성(安城), 맞춤일 터인데……,-
그러나 인가(人家)가 없는 깊은 산중(山中)에는 주막(酒幕)이 있을 턱이 없었다. 얼마를 더 걸어오노라니, 어디선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 깊은 산중(山中)에 웬 사람들이?……,-
혹시 성묘(省墓) 온 사람들이 아닌가 싶어, 김삿갓은 말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아 나섰다. 성묘(省墓)에는 술(酒)과 음식(飮食)을 마련해 오는 법(法)이기에, 술(酒)이라도 한잔 얻어먹을 요량(饒良)이었던 것이었다.
언덕길을 얼마쯤 올라오니 널따란 잔디밭이 있는데, 그 잔디밭 둘레에는 복사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런데 그 잔디밭 한복판에서는 네 명의 칠십객(七十客) 노인(老人)들이 술상 앞에 둘러앉아 술을 마셔가며 흥겹게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비석(鄭飛石) 풍류소설(風流小說) 《소설 김삿갓》 (제2권), 242쪽~244쪽-계속-(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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