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김삿갓》 223
<이 편지(片紙)를 가지고, 내일 사또 어른을 두 사람이 함께 찾아가 뵙도록 하시오, 그러면 사또는 나의 편지(片紙)를 읽어 보신 뒤에, 두 사람에게 자세한 사연(事緣)을 물어보고 나서 송아지(幼牛) 값을 틀림없이 내려 주실 것이오,>
어떤 고을에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救濟)해 주기 위한 ‘구황금(救荒金)’이라는 것은 반드시 있는 법이기에 김삿갓은 그 돈을 이용(利用)해 두 사람의 분쟁(紛爭)을 원만(圓滿)하게 해결(解決)해 주고 싶었다.
두 사람은 분쟁이 원만(圓滿)하게 해결(解決)될 기미(幾微)를 보이자, 김삿갓을 제각기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끌어당겼다.
이에 김삿갓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옛날부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라는 말이 있으니, 밥은 동쪽 집(家)에서 먹고 잠은 서쪽 집(家)에서 자기로 합시다그려>
김삿갓은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라는 말을 무심중(無心中)에 쓰고 나서, 불현듯 그 말에 대한 출전(出典)이 머리에 떠올라, 혼자 웃음을 금치 못했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라는 말은 본디 《사문유취(事文類聚)》라는 책(冊)에 나오는 말로서, 그런 말이 생겨난 데는 다음과 같은 연유(緣由)가 있었다.
그 옛날 중국 제(齊)나라에 묘령(妙齡)의 처녀(處女)가 있었다. 어떤 매파(媒婆)가 중매(仲媒)를 들려고 두 개의 혼담(婚談)을 들고 와서,
-동쪽 신랑(新郞)은 돈(錢)은 많으나 얼굴(容)이 추잡(醜雜)하게 생겼고, 서쪽 신랑(新郞)은 얼굴(容)은 기가 막히게 잘생겼으나, 집이 몹시 가난하다. 그러니 너는 어느 편 신랑(新郞)을 택(擇)하겠느냐?-
하고 처녀(處女)에게 물어보았다.
처녀(處女)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얼굴(容)을 들며 이렇게 대답(對答)하는 것이었다.
<동쪽 집에서는 밥(食)만 먹고, 잠(宿)은 서쪽 집에서 자게 해 주세요,>
그런 일이 있고 나서부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김삿갓은 물론 묘령(妙齡)의 처녀(處女)처럼 잇속을 차리기 위해 그런 말을 쓴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두 사람을 화해(和解)시켜 주려고 그런 말을 썼을 뿐이었건만,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라는 말을 쓰고 나서 생각해 보니 웃음이 나왔던 것뿐이었다.
아무튼 송아지(幼牛) 분쟁(紛爭) 덕택에 김삿갓은 하룻밤을 편히 지내고 다음 날 아침(早)에는 다시 나그네의 길에 올랐다.
좌우편(左右便)에는 잡초(雜草)가 우거져서 오솔길은 갈수록 험난(險難)하였다. 얼마를 가다 보니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어서, 어느 길이 금강산(金剛山)으로 가는 길인지 알(知) 길이 없었다.
길(道)을 또다시 잘못 들면 큰일이기에, 김삿갓은 다리(脚)도 쉴 겸 풀밭(草田)에 주저앉아 행인(行人)을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사람(人)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새소리만 요란(擾亂)스럽게 들려올 뿐이었다.
새소리에 심취(心醉)하여 오랫동안 정신(精神)없이 앉아 있노라니까, 백발노인(白髮老人) 하나가 등에 나뭇짐을 잔뜩 짊어지고 걸어오고 있었다.
<말씀 좀 물어보겠습니다, 금강산(金剛山)에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바른편(右) 길은 회양(淮陽)으로 가는 길이오, 왼편(左) 길로 가시오,>
노인(老人)은 짐이 무거워 대답(對答)하기가 귀찮은지,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김삿갓은 깊은 산중(山中)에서 만난 백발노인(白髮老人)이 신선(神仙)같이 보여서 문득 문동도(文東道, 1646~1699)라는 사람의 옛(故) 시(詩) 한 수가 머리에 떠올랐다.
운수기천리(雲樹幾千里), 산천정묘연(山川政渺然),
상봉각백수(相逢各白首), 굴지계류년(屈指計流年)
*해석하면,
숲은 우거져서 몇천 리인고, 산과 물이 멀고 멀어 아득하구나,
만나 보니 서로가 백발이어서, 손꼽아 지난 세월 세어 보노라.
이 시의 작자 문동도(文東道)는 젊어서 헤어졌던 옛친구(古友)를 백발(白髮)이 되어 다시 만났을 때의 감회(感懷)를 그렇게 읊었던 것이었다.
김삿갓은 물론 백발(白髮)과는 인연(因緣)이 멀었다. 그러나 산중(山中)에서 만나 본 나무꾼의 백발(白髮)이 너무도 인상적(印象的)이어서 그 시(詩)가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었다.
《정비석(鄭飛石) 풍류소설(風流小說) 《소설 김삿갓》 (제2권), 233쪽~235쪽-계속-(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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