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김삿갓》 224
산길(山道)이 워낙 험(險)하여 고개 하나를 넘고 나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부터 넘어야 할 고개는 하늘에 차 닿은 듯이 높아 보이는 것이 아닌가.
눈을 돌려 보니 저 아래 산골짜기에 오막살이 집(家)이 한 채 보인다.
-저 고개를 이제부터 넘으려면 날이 너무도 저물 것이니, 오늘 밤은 숫제 저 집(家)에서 신세(身世)를 지고 저 고개는 내일 넘기로 하리라-
누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애당초 서두를 필요(必要)가 없는 길이었다. 이윽고 오막살이로 찾아와 보니 바깥주인은 보이지 않는데, 젊은 아낙네가 젖먹이에게 젖을 물린 채 저녁놀이 다사롭게 비치는 토방(土房)에서 길게 누워 낮잠(旿寢)을 자고 있었다.
-저런! 해(日)가 저물어 오는데 무슨 놈의 여편네가 저녁 지을 생각은 안 하고 낮잠(旿寢)만 자고 있는고! 몹시도 게으른 계집(女)인가 보구나!-
그렇게 추측(推測)하며 자세(姿勢)히 바라보니, 옷은 시집올 때 입던 것인지 치마저고리에 새까만 땟국이 꾀죄죄 흐르고 있었다.
김삿갓은 냇가로 내려와 여인(女人)이 잠(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인(女人)은 좀처럼 잠(眠)에서 깨어날 줄을 모른다.
이윽고 여인(女人)은 자다 말고 부랴부랴 일어나 앉더니, 이번에는 속바지를 홀랑 벗어들고 이를 잡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낮잠을 늘어지게 자다가 이가 물어 깨어난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계집을 데리고 살려면 서방(書房)이 골치깨나 아프겠구나!-
마침, 그때 남편(男便)인 듯싶은 사내가 나뭇짐을 지고 돌아와 마누라에게 소리를 지른다.
<아이 시장해!……,배가 고파 죽겠는데, 임자는 저녁 지을 생각은 안 하고 무얼 하고 있는 거야, 서방(書房)이 배가 고파할 생각도 좀 해줘야 할 게 아닌가!>
사나이는 남편(男便)답게 제법 큰소리(大聲)를 쳐 보인다. 그러나 마누라의 반응(反應)은 어디서 뉘 집 개가 짖는가 싶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가 물어 죽겠는 걸 어떻~해! 당신은 뱃속(腹內)에 거지 떼가 들어있는 게, 아냐? 점심을 가지고 갔으면서 무슨 배(腹)가 벌써~부터 고프다는 거야,>
사나이는 실랑이를 해보았자 소용(所用)이 없음을 깨달았는지,
<시장해 죽겠으니, 저녁을 빨리, 지으~라구!>
하고 타협(妥協) 조로 나온다.
계집은 그제야 젖먹이를 뒤집어서 업고 부엌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女)가 부엌으로 들어가자마자, 부엌에서는 ‘땡그랑! 하고 그릇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擾亂)스럽게 들려 나왔다.
원체 채신머리가 없는 계집인지라, 부엌으로 엄벙덤벙 들어가다가 질그릇 자배기라도 깨뜨린 모양이었다. 아무려나 김삿갓은 그 기회(機會)를 이용(利用)해 오막살이로 주인을 찾아 들어섰다.
어름어름하다가는 저녁도 굶은 판이기에, 밥을 짓기 전에 미리 주인(主人)을 만날 생각이었다. 김삿갓은 주인(主人)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혀 보이며, 이렇게 부탁하였다.
<지나가는 나그네(過客)올시다, 길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身世)를 졌으면 고맙겠습니다,>
주인(主人) 사나이는 김삿갓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길이 저물었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집(家)이 누추하지만 쉬어 가도록 하시~구료,>
그러고는 부엌에다 대고 소리를 지른다.
<여봐! 손님(客)이 한 분 오셨으니, 밥(食)을 넉넉히 지어요>
주인(主人)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와 보니, 한편 구석에 베틀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베를 짜다가 언제부터 그냥 내버려두었는지, 베틀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이윽고 김삿갓은 등잔(燈盞) 아래에서 주인(主人)과 겸상(兼床)으로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밥은 통 알 채로 지은 옥수수밥인데다가, 반찬이라고는 짠 무김치 한 접시가 덜렁 놓여 있을 뿐이었다.
옥수수알을 통째로 지은 밥이어서 먹기가 매우 거북스러웠다. 옥수수밥을 지으려면 옥수수를 맷돌에 갈아서 지어야 하는 법이건만, 주인(主人) 마누라는 맷돌질하기가 귀찮아 숫제 통 알 채로 지은 모양이었다.
주인(主人)은 손님에게 민망(憫惘)스러운 생각이 들었는지, 옆에 앉아 있는 마누라를 넌지시 나무란다.
<옥수수밥을 지으려거든 옥수수를 맷돌에 갈아서 지을 일이지, 왜 통 알 채로 지었~수?, 옥수수알이 제각각 놀아서 어디 씹을 수가 있는가,>
《정비석(鄭飛石) 풍류소설(風流小說) 《소설 김삿갓》 (제2권), 235쪽~237쪽-계속-(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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