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시절을 회상하며>(군 생활 2~2)
헌법 제5조(침략적 전쟁의 부인·국군의 사명, 정치적 중립성)
1) 대한민국은 국제(國際) 평화(平和)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侵略的) 전쟁을 부인한다.
2)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安全保障)과 국토방위(國土防衛)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政治的) 중립성(中立性)을 준수한다.
이듬해(1974년) 초에 울산지소(蔚山支所)로 발령이 났다. 몇 개월 근무하다가, 6월 15일에 정규 부대에는 입대(入隊)치 못하고, 결국 방위병으로 <울경사(蔚警司)> 소속의 고사포부대(高射砲部隊)에 배치되었다. <울경사>는 울산지구 경비사령부(警備司令部)의 약칭이다.
울산은 공업 도시로 방위시설(防衛施設)이 많은 지역이다. 따라서 그 시설들을 지키기 위한 군부대가 필요했다. 그것이 고사포부대다. 이런 포(砲) 부대가 울산 시내를 둘러싼 산꼭대기에 수십 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방위병들은 오후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하는 야간 근무였다. 부대에는 현역인 기관병(機關兵)이 있고 우리는 훈련병(訓鍊兵)이다.
당시 훈련은 기합(氣合)에서 시작하여 기합으로 끝났다. 부대에 들어갈 때도 기어서 들어가고 나올 때도 기어서 나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훈련이라기보다는 체벌(體罰)에 가까웠다. 정말 사람으로서 감당키 어려웠다.
그뿐만 아니라 객지(客地)에서 군(軍) 생활은 더욱 힘들었다. 야간에만 근무하니 출퇴근이 힘들고 하숙도 해야 하니 생활비도 걱정이다. 당시에는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묘책(妙策)을 궁리(窮理)했다. 고사포부대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고, ……,
그러면 고사포부대도 면(免)하고 생활도 나아지겠다는 계산이었다. 드디어 주소지(住所地)를 고향으로 옮겨 고사포부대를 벗어났다. 하루도 근무하기 힘든, 고사포(高射砲)부대에서 30여 일이나 복무(服務)하였으니, 진(盡)이 다 빠졌다. 다른 동료 방위병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참고로 방위병(防衛兵)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1969년 4월 5일부터 1996년 6월 25일까지 존치(存置)된 제도였다. 당시 군 인력이 남아돌아 비상조치(非常措置)로 시행한 제도였다. 방위병은 주소지에서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산청으로 간 나는 예비군(豫備軍) 중대(中隊) 본부(本部)에 배치(配置)되었다. 그곳은 고사포부대(高射砲部隊)에 비하면 누워서 떡 먹기, 만큼이나 수월했다. 그렇다고 좋은 점만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곤, 때때로 예비군(豫備軍) 대원들에게 훈련 통지서(通知書)를 전달(傳達)하는 일과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로 진주(晉州)에 있는 대대(大隊)에 문서를 수발(受發)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리고 시장(市場) 일(日)(산청 장날은 1일과 6일임)이면 예비군 소대장(小隊長)들과 막걸리나 마시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곳에서 나머지 1년 2개월이라는 군 생활이 계속되었다.
한편, 내 군번은 92740188번이다. 신기하게도 짧은 군 생활이지만 군번(軍番)만은 잊어버리지 않는다. 참고로 방위병(防衛兵)의 군번은 9자로 시작한다.
군대에서는 군복(軍服)은 물론이고 군화(軍靴)와 모자(帽子) 등 모든 것이 국비(國費)로 지출되는 것이 기본이지만 방위병은 모든 것을 사비(私費)로 사야 했다. 지금은 방위병 제도가 사라졌다만, 있었다면 개선(改善)하여서 할 일이다. 방위병도 엄연한 군인(軍人)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군대(軍隊) 이야기라면 밤새는 줄 모르고 즐긴다. 당시 우리(방위)들 사이에는, 방위는 위관급(尉官級) 장교라고 허풍(虛風)을 치고 다녔다. 즉 대위(大尉)와 소령(少領) 사이에 방위(防衛)가 있다고 우겼다.
방위병들은 일반 사회로 따지면 비정규직(非正規職)에 해당한다. 얼마나 정규직을 그리웠으면 그런 엉터리 같은 주장까지 하였을까 싶다. 정규직 병장(兵長) 출신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준장(准將) 아래 대령(大領) 위의 오성 장군의 하나라며 나름대로 뻐기고 다녔다.
방위병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엄연한 군인이다. 군인은 부대를 옮기면 상급 부대에 가서 신고해야 한다. 그래서 나도 전보(轉補) 명령서를 가지고 창원에 있는 39사령부로 신고하러 갔다. 가는 버스 안에서 방송으로 육영수(陸英修, 1925~1974) 여사의 슬픈 소식을 들었다.
1974년 8월 15일 8.15 경축식장(慶祝式場)에서 문세광이 쏜 총에 육 여사(女史)가 희생(犧牲)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큰 충격(衝擊)이었고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정부가 몰락(沒落)으로 가는 좋지 못한 징조(徵兆)였다.
나는 그해(1974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에 군(軍) 생활에서 최고의 선물(膳物)로 아름다운 처녀(處女)를 만나 부산(釜山) 서면의 한 예식장에서, 고등학교 은사(恩師)님을 주례(主禮)로 모시고 조촐한 결혼식(結婚式)을 올렸다. *여전히 백년해로(百年偕老) 중이다.
그리하여 세월이 흘러 총 1년 3개월의 군 복무(服務)를 마치고 1975년 9월 4일 자로 전역(轉役)하여 직장인 울주군농협(蔚州郡農協)으로 복귀(復歸)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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