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시절을 회상하며> (예금 추진 2)
그때가 남창(南倉) 지소에 근무할 때이니 1971년 봄으로 기억(記憶)한다. 그때 고리(古里) 원자력 건설(建設) 공사(工事)가 한창이었다.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원자력(原子力) 발전소(發電所)가 건설된다고 세상(世上)이 시끌시끌하였다.
원전(原電)이 건설되는 장소(場所)는 부산광역시(釜山廣域市) 기장군(機張郡) 장안면(長安面) 고리(古里), 효암리(孝岩里)와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 서생면(西生面) 신암리(新巖里) 일대(一帶)에 위치(位置)하며 총 4기가 건설(建設)되었다.
원전이 들어설 부지(敷地)가 확정되어 수용(收用)되면, 부지에 대한 토지 보상금(補償金) 지급도 동시에 일어난다. 보상금을 예금(預金)으로 유치(誘致)하려는 움직임이 금융가(金融街)의 관심 사항이었다. 특히 원전 사업은 보상 금액도 많고 일시에 지출(支出)되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는 일과(日課)를 마치면 약 20km의 비포장도로를 달려 원전 부근(附近)을 찾아서 원전에 편입(編入)되는 토지 소유주(所有主)를 대상으로 예금 유치전(誘致戰)을 벌였다. 유수(有數)의 은행들은 물론이고, 신협(信協) 등에서도 현지(現地)로 와서 노상 살았을 것이다.
그러니 당시(當時) 원전의 중심지 고리(古里)에는 밤마다 술집들로 불야성(不夜城)을 이룰 정도로 호황(好況)을 누렸다. 수많은 자금(資金)이 풀리고 수백 명의 지주(地主)들과 금융권 인사(人士)들이 모여서 복작거렸을 것이니 자연 지역(地域)경제(經濟)도 반짝 살아났다.
우리 남창 지소 직원(職員)들도 낮에는 사무실에 근무하고, 일과(日課)를 마치기가 무섭게 저녁도 먹지 못한 채, 고리(古里)를 찾아서, 보상금을 수령(受領)하는 토지 소유주들을 상대(相對)로 예금 유치에 총력전(總力戰)을 벌였다.
특히 우리 직원들을 김우경(金宇經) 대리(代理)님이 주도(主導)하셨는데, 이분의 활약(活躍)이 눈부셨다. 이분은 이곳 온양면(溫陽面)이 고향(故鄕)으로, 발이 무척 넓으며, 사교술(社交術)도 뛰어나고, 술도 두주불사(斗酒不辭)요 성격도 무골호인(無骨好人)이셨다.
그분을 중심으로 근 6개월 정도 노력한 끝에 거액(巨額)을 예금(預金, 주로 기한부 예금인 통지예금)으로 유치(誘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토지 소유주(所有主)들이 모두 농어민(農魚民)들이기 때문에 농협(農協)이 유리한 입장(立場)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71년도 말에 예금 실적이 월등(越等)하여 사무소(事務所) 표창(表彰)을 받았다. 역시 열심히 노력한 보람을 느끼는 한 해였다. 다만, 만만찮은 교통비며 거액의 술값들은 모두 김 대리님의 돈으로 계산했는데, 보상(報償)이라도 받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점이 아쉽다.
당시에는 사무실 소유의 차(車)도 없던 시절(時節)이라 개인 소유의 영업용 차(車)를 전세(專貰) 낼 수밖에 없었는데, 온양면(溫陽面)에서 한 대밖에 없는 시발택시를 이용했었다.
*김 대리님은 그 후 덕하(德下) 지소장으로 영전하셨다가 폐암으로 일찍 별세하셨다.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 빌면서, 그분은 고등학생인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두셨는데, 느지막이 둔 아들은 유치원생(幼稚園生)이었다. 두 딸이 내 결혼식(結婚式)에 참석하여 축하해주었다.
고리원자력발전소(古里原子力發展所)는 1971년 3월 19일 기공식(起工式)을 가졌고, 78년 7월 20일에 완공(完工)되었다. 장장 8년 4개월 만에 52만 평의 부지(敷地) 위에 건설된, 대역사(大役事)였다. 미약하나마 우리나라에도 원자력의 시대(時代)가 활짝 열렸다.
그 시절에 관할 조합(組合)인 온양농협(溫陽農協)에서 누군가가 농약(農藥)을 팔아먹고 매출 기표를 하지 않아 재고가 부족한 사고가 있었는데, 군 조합의 경영 진단사(診斷士, 조합 경영을 진단하는 직원)가 수십 일 동안 출장을 나와서 검사를 했는데, 그 일을 도와주던 일,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69년도 여름에 3선 개헌을 저지(沮止)하겠다고 애국시민들이 길거리로 나가 반대 시위를 하고 난리굿을 쳤지만,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결국 그해 10월에 국민투표까지 거쳐서, 헌법은 개정(제6차 개헌)되고 말았지만,
그러나 영구(永久) 집권(執權)의 꿈을 버리지는 못해, 결국 72년도에 실시한, 10월 유신(維新, 유신은 낡은 제도를 새롭게 고치자는 뜻인데, 이름과는 달리 한국적 민주주의(民主主義)가 필요하다며 유정회(維政會)를 만들었으니, 오호통재(嗚呼痛哉)라!)을 선포(宣布) 하였는데,
목구멍이 포도청(捕盜廳)이라, 면사무소(面事務所)를 비롯한 농촌지도소(農村指導所) 등 행정기관(行政機關) 직원(職員)들과 상부(上部)에서 내려온 유신 홍보자료(弘報資料)를 들고, 야간(夜間)에 마을을 돌면서 정권의 시녀(侍女) 노릇을 하는데 들러리를 선 일,
휴일이면 고등학교(高等學校) 선배(先輩)님(면사무소 계장님 두 분, 초등학교 선생님 한 분, 교육청 계장님 한 분, 그리고 관할 파출소장님 등)들과 질펀하게 막걸리를 마시면서 난상토론(爛商討論) 하든 일들이 생각난다.
모두 그리운 분들이다. 그분들께도 행운이 함께하시길 기원(祈願)한다. 그렇게 하여 소생(小生)의 젊은 시절은 한여름 밤의 소나기처럼 도도(滔滔)히 흘러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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