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김삿갓》 172
<향약계(鄕約契)라는 것은 그런 때를 위해 생겨난 것인데, 그것을 누가 반대(反對)는 하겠습니까, 설사 반대하는 사람이 한두 명쯤 있다손 치더라도, 옳다고 생각되는 일은 대담(大膽)하게 실천(實踐)해 나가셔야만 차수 어른의 권위(權威)가 확립될 것이 아닙니까.>
무봉(無縫)은 ‘차수(次首) 어른의 권위(權威)가 확립(確立)된다’라는 말이 무척 마음에 드는지 크게 기뻐하면서,
<사후(事後) 처리를 그렇게 해준다면 모두가 나를 우러러보게 되겠지요?>
그리고 잠시 뜸을 두었다가,
<누가 파를 훔쳐 갔는지 범인(犯人)을 내 손으로 잡아내기만 하면 그 이상(以上) 좋은 일은 없을 터인데……, >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범인(犯人)을 잡아내자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김삿갓이 무심(無心)히 그렇게 말하자, 무봉(無縫)의 눈이 별안간 휘번덕거린다. 무봉(無縫)은, 범인(犯人)을 잡을 수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트이는지 김삿갓의 손을 덥석 움켜잡는다.
<삿갓 선생(先生)! 범인을 우리 손으로 잡아낼 수 있다구요? 그게 정말입니까?>
김삿갓은 내가 너무도 입바른 소리를 했구나 싶어 약간 뉘우치는 기색(氣色)을 보였다.
<물론 범인을 꼭 잡아낼 수 있다고 장담(壯談)하기는 어렵지만, 머리를 잘만 쓰면 범인(犯人)을 알아내기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범인을 정면(正面)으로 밝혀내는 데는 별로 찬성(贊成)을 못 하겠습니다.>
그 소리에 무봉(無縫)은 펄쩍 뛸 듯이 놀라 보인다.
<범인을 잡아내는 데 찬성(贊成)을 못 하겠다니, 삿갓 선생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잡을 수 있는 범인(犯人)을 붙잡지 않고 그냥 내버려둔다는 것은, 도둑을 권장(勸獎)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씀이오!>
김삿갓은 웃으면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나라 속담(俗談)에 ‘호랑이도 쏘아 놓고 보면 불쌍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둑놈을 잡고 나면 일시적(一時的)으로는 기분이 명쾌(明快)할지 모르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마을 사람 하나를 영원히 매장(埋葬)해 버리는 결과(結果)가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놈은 매장을, 시켜 버리는 것이 당연(當然)한 일이 아닐까요.>
<무봉(無縫) 선생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어젯밤에 파를 훔쳐 간 범인은 반드시 우리 마을 사람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도둑을 정면(正面)으로 밝혀낼 생각은 단념(斷念)하시고, 그 사람이 다시는 그런 짓을 못 하도록 간접적(間接的)으로 선도(先導)해 나가는 것이 지도자(指導者)로서는 가장 현명한 방법(方法)일 겁니다.>
<도둑놈은 반드시 우리 마을 사람일 것이라고 삿갓 선생(先生)은 어디다 근거(根據)를 두고 그런 단정(斷定)을 하시오?>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簡單)합니다, 파밭에서 파를 몽땅 캐어 가려면 시간(時間)이 꽤 많이 걸렸을 테니까, 만약 낯선 사람이 와서 그런 짓을 했다면 집집마다 개(犬)가 굉장히 짖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젯밤에는 어느 집에서도 개(犬)가 짖지 않았다고 하니, 그렇다면 범인(犯人)은 마을 개(犬)들이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확실(確實)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범인(犯人)은 마을 사람이 분명하다는 것을 단정(斷定)할 수 있을 겁니다.>
<음……,>
무봉(無縫)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그렇군요, 그렇다면 더구나 범인(犯人)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일이 아니오>
<제 생각은 무봉 선생과 정반대입니다, 한 번 실수(失手)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범인을 직접 밝혀내기를 포기하고 그 사람을 간접적(間接的)으로 선도(善導)해 나가도록 하셔야 합니다>
도난(盜難) 사건의 사후(事後) 처리에 대해, 무봉과 김삿갓의 의견은 정면(正面)으로 대립(對立)하였다.
무봉(無縫)은 마을의 안녕(安寧)과 질서(秩序)를 위해 범인을 마땅히 색출(索出)해 내야 한다는 주장(主張)이었고, 김삿갓은 백락촌(百樂村)을 참다운 지상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도둑놈조차도 감화(感化)시켜서 양민(良民)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主張)이었다.
다시 말하면, 무봉(無縫)은 ‘마을 안에 도둑놈을 그냥 두어 가지고서는 마을을 어떻게 지상(地上) 낙원(樂園)으로 만들 수 있겠느냐’하는 주장(主張)이었고,
김삿갓은, ‘도둑놈 한 명쯤 개과천선(改過遷善) 시킬 능력(能力)이 없다면 그런 지도력(指導力)을 가지고 어떻게 지상(地上) 낙원(樂園)을 만들 수 있겠느냐’하는 주장(主張)이었다.
《정비석(鄭飛石) 풍류소설(風流小說) 《소설 김삿갓》 (제2권), 112쪽~114쪽-계속-(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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