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시절을 회상하며> (첫 임지)
1969년 12월 중순, 나는 가방 하나와 이불 보따리를 둘러메고 부전역(釜田驛)에서 동해남부선 보통열차에 몸을 싣고, 첫 부임지(赴任地)로 향했다. 날씨는 매서웠지만, 마음은 푸근하였다. 드디어 나는 독립인(獨立人)이요 자유인(自由人)이 된 것이다.
앞으로 내 혼자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하지만 어쩐지 불안(不安)하기도 하다. 과연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친구(親舊)들도 그립고 보고 싶다. 기차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적(汽笛)소리만 내고 달린다. 북(北)으로, 북(北)으로……,
첫 임지(任地)는 울산의 울주군조합(蔚州郡組合)이었다. 농협은 인간적(?)인 기관(機關)이라 발령 전에 희망지(希望地)를 스스로 적어 내도록 하였다. 그래서 부산으로 써내었다. 부산(釜山)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학업을 이어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상고(商高) 1학년 때는 진학(進學), 취업(就業) 구분, 없이 반(班) 편성이 되었는데, 2학년부터는 진학 3학급, 취업 5학급으로 구분 되어있었다. 그래서 2학년 때는 진학반(進學班)에서 공부하다가 3학년 때는 고민(苦悶)하다가 결국은 취업반(就業班)으로 방향을 바꿨다.
주경야독의 욕망(欲望) 때문에, 근무 희망지를 부산(釜山)으로 하였더니, 인사(人事) 담당자는 그것은 불가하다는 답변(答辯)이었다. 첫 발령(發令)은 무조건 지방(경남)으로 낸다는 것이었다. 그때 부산은 경남의 도청소재지(道廳所在地)라 지방이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그런 줄로 믿고 고향(故鄕) 산청(山淸)으로 지원하려다가, 그래도 학업의 꿈을 버릴 수가 없어서 경남에서 가장 큰 도시인 울산(蔚山)으로 지원하였다. 당시에는 도별(道別)로 채용 시험을 보았는데, 그때 경기 지역에는 이호권 57 동기가, 경남 지역에서는 내가 합격(合格)하였다.
발령(發令) 이후에 확인(確認)한 사실이지만 부산(釜山)으로 발령(發令)받은 사람도 있었다. 농협(農協)의 첫인상이 이때 처음으로 뒤틀어졌다. 그래서 좀 따져 보려다가,……, 원칙(原則)에는 언제나 예외(例外)는 있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당시의 울산은 한창 공업단지(工業團地) 조성으로 정신이 없는 도시였다. 울주군조합은 전국에서도 규모가 상당히 큰 농협이었고, 조합장(組合長)은 중앙회의 대의원(代議員)이었다. 그러하니 그는 농협 내외(內外)에서도 무시(無視)할 수 없는 분이었다.
하지만 조합장은 비상근(非常勤) 명예직(名譽職)이라 업무에는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기에 직원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두려운 인물은 아니었다. 대신 모든 업무(業務)는 전무(專務), 상무(常務), 대리(代理)라는 책임자들이 처리(處理)하였다.
임지(任地)를 찾아 울산으로 가니, 거기서 나를 본소(本所)가 아닌 남창(南倉) 지소로 발령을 내주었다. 울주군농협은 언양, 신정, 야음, 덕하 등 지소들이 많았고, 지금은 경상남도(慶尙南道)에서 분리되어 아예 광역시(廣域市)가 되었다.
그때 울산으로 발령받은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세 사람 중에 다른 두 사람은 본소에 두고, 나만 지소(支所)로 발령(發令)을 내어주었다. 다른 두 사람은 그곳 출신(出身)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높은 사람이 근무하는 곳에서 함께 일하고 싶은 욕망(欲望)이 있는데,……,
좀은 섭섭하였다. 무엇보다도 울산 시내에 근무하고 있어야 야간(夜間) 대학에 등록할 것인데, 남창이라니,……, 슬픈 심정이었다. 농협의 이미지가 또 뒤틀렸다. 게다가 그곳에 도착하니 아직 전기(電氣)도 들어오지 않아 사무실에는 램프 등(燈)을 켜고 있었다. 더욱 슬펐다.
남창이라는 곳은 온양면 남창리로 면(面)도 아니고 일개, 리(里)이지만, 면 소재지이고 역(驛)이 있어 교통은 편리하였다. 남창 지소는 울주군농협 사무소(事務所) 중에서 부산 쪽에 가장 가까운 사무소였다. 부산에서 공부한 나를 배려 차원에서 이곳으로 보냈다면 할 말은 없겠다.
남창역(南倉驛)은 울산에서 부산으로 오면, 울산역이 출발역이고, 다음이 덕하역<(德下驛, 청량면(靑良面), 소재)>이고, 그다음이 남창역<(南倉驛, 온양면(溫陽面), 소재)>이다. 지금은 그사이에 망양역(亡羊驛), 개운포역(開雲浦驛) 태화강역(太和江驛) 등이 더 생겼다.
그러나 그곳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나에게는 소중한 곳이 되었다. 남창 지소는 일제 강점기(强占期) 금융조합 건물 그대로였다. 면 소재지 요지(사거리)에 있었으며, 길 건너편에 창고, 창고(倉庫) 옆에는 초등학교(初等學校), 그 뒤편으로 면사무소(面事務所)도 있었다.
수년 후에 남창 지소는 폐쇄(閉鎖)되었고, 건물은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 온양농협이 들어섰다. 남창 지소는 온양면(溫陽面)과 온산면(溫山面), 2개 면을 담당구역으로 하는 전형적인 농어촌(農漁村) 지역이다. 양 개 면은 모두 바다를 끼고 있어, 생활도 넉넉한 편이었다.
나는 3개월의 수습을 받았다. 수습(修習)은 정식 직원으로 발령받기 전에 여러 업무를 두루 경험하라는 근무 형태를 말한다. 고정적인 급여(給與)는 없었고 식대(食代)만은 지급된 것으로 기억한다. 식사는 인근의 보신탕 전문점에서 해결하고 잠은 당직실에서 잤다.
수습 기간에는 사무소 청소를 비롯하여, 본소에 자금(資金) 수송(輸送)이나, 마을 출장(出張) 등을 따라다니곤 했다. 그 후, 70년 3월 15일에 정규(定規) 직원으로 발령(發令)을 받았다. 그때 월급이 일만 육천 원 정도였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액수(額數)였다.
아마도 내보다 5년 선배 되는 분이 초등학교에서 부부(夫婦)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들 부부의 월급 합산이 그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때 한 달 하숙비(下宿費)가 사천 원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하여 나는 남창(南倉)이라는 낯선 곳에서 서서히 정착(定着)되어 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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