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이상문학상』의 선고위원회(選考委員會)의 위원들은 다음과 같이 당 시대의 명망가 들이었다. 김동리 작가, 김윤식 평론가, 이병주 작가. 이어령 평론가, 이청준 작가 등 다섯 분이다. 이처럼 『이상문학상』은 권위가 있었다.
그러면 수상작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도입부와 마지막 부를 읽어보자.
*벌써 30년이 다 돼가지만, 그해 봄에서 가을까지의 외롭고 힘들었던 싸움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때처럼 막막하고 암담해진다. 어쩌면 그런 싸움이야말로 우리 살이가 흔히 빠지게 되는 어떤 상태이고, 그래서 실은 아직도 내가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받게 되는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자유당 정권이 아직은 그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던 그해 3월 중순, 나는 그때껏 자랑스레 다니던 서울의 명문 국민학교를 떠나 한 작은 읍(邑)의 별로 볼 것 없는 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공무원이었다가 바람을 맞아 거기까지 날려간 아버지를 따라 가족 모두가 이사를 가게 된 까닭이었는데, 그때 나는 열두 살에 갓 올라간 5학년이었다.
그 전학 첫날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들어서게 된 Y국민학교는 여러 가지로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웅장한 3층 본관을 중심으로 줄줄이 늘어섰던 새 교사(校舍)만 보아 온 내게는, 낡은 일본식 시멘트 건물 한 채와 검은 타르를 칠한 판자 가교사(假校舍) 몇 채로 이루어진 그 학교가 어찌나 초라해 보이는지 갑자기 영락한 소공자(小公子)의 비애(悲哀) 같은 턱없는 감상에 젖어 들기까지 했다.
크다는 것과 좋다는 것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한 학년이 열여섯 학급이나 되는 학교에서 공부해 온 탓인지 한 학년이 겨우 여섯 학급밖에 안 된다는 것도 그 학교를 까닭없이 얕보게 했고, 남녀가 섞인 반에서만 공부해 온 눈에는 남학생반 여학생반이 엄격하게 나누어져 있는 것도 촌스럽게만 보였다. -중략-
그 악연은 잠시 뒤 나를 반 아이들에게 소개할 때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 전학 온 한병태다, 앞으로 잘 지내도록.-
담임선생님은 그 한마디로 소개를 끝낸 뒤 나를 뒤쪽 빈자리에 앉게 하고 바로 수업에 들어갔다. 새로 전학 온 아이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자랑 섞인 소개를 늘어놓던 서울 선생님들의 자상함을 상기하자 나는 야속한 느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대단한 추켜세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내가 가진 자랑거리는 반 아이들에게 일러주어, 그게 새로 시작하는 그들과의 관계에 도움이 되기를, 나는 바랬다. -이하 생략-
**이렇게 시작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맺는다.
-여보, 당신 왜 그러세요?
영문도 모르고 내 곁에 붙어 섰던 아내가 가만히 옷깃을 당기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그제서야 눈을 뜨고 다시 ‘석대’ 쪽을 보았다. 그 사이 수갑을 받은 ‘석대’는 두 손으로 피 묻은 입가를 씻으며 비척비척 끌려가고 있었다. 내 곁을 지날 때 힐끗 나를 곁눈질했지만 조금도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잠든 아내와 아이들 곁에서 늦도록 술잔을 비웠다. 나중에는 눈물까지 두어 방을 떨군 것 같은데, 그러나 그게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또 세계와 인생에 대한 안도에서였는지 새로운 비관(悲觀)에서였는지는 지금에조차 뚜렷하지 않다. (끝)
***엄석대! 그는 우리 반의 작은 영웅이었다. 아니 우리들 청춘의 왕이었다. 그런 석대가 쇠고랑을 찼다. 그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었는가, 그러나 화자인 나 한병태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술잔을 비웠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긍정인지, 부정인지, 인생의 허무인지, 안도인지, 비관인지, 지금에조차도 뚜렷하지 않다. 각설하고 제주 올레나 걸어보자.
▲고근산 정상에는 수천 평은 됨직한 커다란 분화구와 <대륜 명소 12경>이라는 긴 입간판이 서 있다. <대륜>은 이곳의 동(洞)명이다.
명소 12경을 살펴보자. 1경) 대륜동 해안가, 2경) 윗세오름, 3경) 하 논, 4경) 외돌개, 5경) 월드컵경기장, 6경) 범섬, 7경) 각시바위, 8경) 속 골, 9경) 최영 장군 범섬의 승리, 10경) 고근산, 11경) 돔베낭 길, 12경) 연동 연대 등인데,
저 외돌개와 범섬과 윗세오름까지가 대륜동이라니, 대륜(大輪)은 말 그대로 넓긴 넓은 동(洞)이란 것을 알겠다. 그런데 다른 곳은 말이라도 들어보았는데, <각시바위>는 생소하다. 다음 기회에 알아보기로 하자.
또 정상에는 하이킹 여행자들 여럿이 옷깃을 스치며 분화구 주변을 돌고 돌고, 일반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분화구를 돌고 돈다. 우리도 정상의 분화구를 한 바퀴 돌고 북 사면 가파른 길을 타고 내려왔다. 걸어보니 고근산 길은 인근 주민들에게 사랑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길이다. 이런 산이 여기 있다는 것이 이곳 주민들에게는 큰 축복이겠다.
길은 <한라하이츠>라는 숙박업소를 비켜 돌아서 내려와, 산뜻한 게이트볼장 하나를 지나 또다시 중산간도로에 이른다. 도로변에는 꼬부랑 노부부가 어디론지(아마도 운동?) 가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할머니의 손을 맞잡고 걷고 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그들이 먼저 가고 있을 뿐인데 보기 좋은 풍경이다. 우리도 따라 걷는다.
도로를 따라 계속 걸으니 잘 꾸며진 정원 속에 <제남 아동복지센터>가 우리를 기다린다. 여기가 올레 중간 스탬프를 찍는 곳이다. 길은 또다시 중산간도로를 건너 마을로 내려선다. 마을 속의 교회 하나가 언제나 그렇듯이 예스럽고, 또 걸어 내려가니 서귀포농협 서부지점 벽에 붙은 플래카드 두 개가 눈길을 끈다.
하나는, <축, 14대 현영택 조합장 취임>이고 다른 하나는 <감귤원 간벌, 고품질 감귤 생산의 시작입니다>라는 조합원 계몽 플래카드다. 예전에는 조합별로 하던 선거를 농협법 개정으로 금연부터는 전국적으로 동시에 선출했다. 그래서 축하 플래카드가 걸렸구나.
내막이야 잘 모르지만, 조합원의 선거를 통해서 선출되었으니 축하할 일이다. 그 후 그 조합장은 2022년 9월 현재 농민신문사 대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감귤나무는 감귤원 간벌(間伐) 사업으로 그 아까운 가지를 그렇게 많이들 잘렸구나, 걸으면서 농사도 배운다.
길은 마을 안길과 차도를 번갈아 걷고, <서호초등학교>를 지나 <용당교차로>에서 또 한 번 일주도로를 건넌다. 교차로의 식당 간판이 네온사인 불빛에 뻔쩍이는 것을 보니 마음이 바빠진다. 마음이 바쁘면 보이는 곳도 적어질 터,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걸었다. 일곱 시에 외돌개휴게소에서 누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은 잠시 접어두자.
하지만 발이 빨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주도로를 빠져나온 길은 왼쪽 숲으로 들어간다. 제법 으스스한 길을 따라 내려서니 오른쪽에 절 하나가 반갑다. <봉림사(鳳林寺)>다. 1929년에 용주사였다가 4.3사건에 연루되어 불타고, 1968년에 황림사(黃林寺)로 재건하여 1983년에 봉림사가 되었다는 설명을 안내문이 하고 있다. 절은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이었다.
우리는 절 정원의 작은 돌 위에 앉아 준비한 절편 하나씩을 먹었다. 절 입구의 수도꼭지에서 목도 축이고 절을 나서서 아래로 밭담 길을 조금 걸으니 아, 넓은 저지대 평지가 나타난다. 여기가 21만 평에 달한다는 <하 논>이리라.
<하 논>, 큰 논이란 뜻의 <하 논>은 제주에서 거의 유일하게 벼를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이다. 논둑길을 걸으며 논바닥을 보니 벼 그루터기가 남아있다. 지난해 벼를 심은 흔적이다. 올해는 물론이고 해마다 벼농사는 계속되리라.
또한, <하 논>도 역사의 현장이다. 1900년에 서귀포에서 첫 성당이 세워진 곳이고, 그 성당이 빌미가 되어 이재수 난의 도화선이 된 곳이라 전한다.
한편, 해방 직후는 반란군을 잡는다고 국가가 마을을 불태워 주민 일백여 명이 생의 터전을 잃은 4.3의 현장이기도 하다. 논이 귀한 제주에서 쌀농사로 잘 살아가던 농민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이제 구름 속의 해도 서산으로 기울었는지 어둠이 주위를 내리깔고 있다. 스산한 길을 지나 삼매봉 기슭에 다다르니 차도다. 차도를 건너 왼쪽으로 조금 걸으니, 외돌개휴게소가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을 내고 있다. 시계를 보니 밤 7시가 조금 넘었다.
오늘처럼 해가 넘어간 이후에 걷기는 처음이다. 제주 올레 7~1코스가 왜 알파 코스에 포함되었는지 걷고 나니 알만하다. 세계 4대 폭포인 <엉또폭포>, 서귀포의 전망대 <고근산>, 역사의 현장이요, 제주도에서 한국인의 주식인 쌀의 유일한 생산지인 <하 논>, 이들이 있기에 올레길이 빛나고 있음을 체험한 하루였다. -50) -계속-
<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52 (8) | 2024.10.10 |
---|---|
<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51 (15) | 2024.10.08 |
<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49 (38) | 2024.10.05 |
<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48 (15) | 2024.10.04 |
<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47 (6) | 2024.10.03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