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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향기를 찾아서>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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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석봉1 2024. 9. 2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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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향기를 찾아서고창 선운사와 부여 정림사지 탐방.

 

백제는 계묘년(기원전 18) 동명왕의 셋째(혹은 둘째) 아들인 온조왕(溫祚王)이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해 즉위한 후 45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기원전 5년에 한산(漢山, 지금의 경기도 광주, 廣州)으로 옮겼다.

 

이후 신미년(371, 13대 근초고왕)에 북한산으로 옮기고, 을묘년(475, 22대 문주왕)에 웅천(熊川, 현 공주)으로 옮겼다가, 무오년(538, 26대 성왕)에 사비(현 부여)로 도읍을 옮겼으나, 경신년(660)에 나라가 없어졌다. 결국 온조왕이 나라를 세운 기원전 18년으로부터 660년까지 지속되었으니, 678년 동안 유지한 고대 국가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해 인도 동북부 지방과 네팔에 있는 마가다 왕국을 중심으로 창시되었다. 싯다르타는 카필라 성주(城主) 슈도다나 왕을 아버지로 하고, 마야 부인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으며, 사카족에 속하는 크샤트리아 계급이었다.

 

*참고로 인도에는 4개의 카스타(계급)가 있는데, 맨 위층에 브라만(승려), 그다음으로 크샤트리아(귀족 또는 무사), 다음이 바이샤(평민 또는 상인), 최하위층이 수드라(수공업자 또는 노동자)로 분류하였다. 위의 4계급 아래에 1950년대까지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 있었으나 법으로 금지했다.

 

200년 뒤에 쿠샨왕조의 3대 카니슈카 왕은 많은 절과 탑을 세우고 불교를 장려하였다. 그 후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한 시기는 고구려는 소수림왕 2(372),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 신라는 법흥왕 14(527)에 이르러 공인되었다.

 

이후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석가의 근본정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비판이 승려들 사이에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런 비판 세력을 대승불교라 하고, 기존의 학문에만 전념하자는 승려들은 소승불교라 하여 그때부터 대승, 소승으로 갈라진다.

 

, 대승은 석가의 가르침을 전파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소승은 자신의 구제에 힘쓰는 것이 목적이다. 대승은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남아의 북방으로, 소승은 태국, 미얀마, 라오스 등 남방으로 전파되었다.

 

백제와 불교 서론은 이쯤하고, 919일 우리는 고창으로 향했다. 우선 고창에서는 선운사(禪雲寺)와 도솔암(兜率庵) 주변을, 부여에서는 정림사지(定林寺址)를 일람할 요량(料量)이었다.

 

선운산에 도착하니 시계는 낯 12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선운산 들머리에는 장어구이 전문집들이 즐비한데, 마침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낮이라 따가운 햇살을 피하기 좋은 곳인, 나무가 우거진 식당으로 들어가서 그 유명한 풍천장어구이 한 상을 받아 들었다. 소문대로 그 맛이 진 맛이다. 그런데 가격이 좀 과하다. 1인분에 35천 원이란다. 여기에 공깃밥 두 그릇에 2천 원까지라, 합이 72천 원을 계산하니 배도 부르다.

 

선운사는 고창군 아산면 선운산 도립공원 안에 위치하며, 삼국시대(577, 위덕왕 24) 백제의 고승 검단(檢旦, 黔丹)이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의 진흥왕(534~576)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사찰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다. 참고로 대한불교 조계종은 제1교구에서 제25교구(Parish)가 있는데, 1교구는 서울 조계사고 제25교구는 남양주의 봉선사다.

 

선운사는 도솔암(兜率庵), 참당암(懺堂庵), 석상암(石床庵), 동운암(東雲庵), 수선암(修善庵) 등 다섯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고. 선운산 주변에는 도솔(兜率) 폭포, 도솔제(), 천연기념물인 도솔암 장사 송(), 템플스테이, 녹차밭도 일람(一覽)하였다. 도솔 폭포는 인공 폭포인데 상당히 웅장하였다. 50분 일하고 10분 쉰다고 한다. 아마도 전기를 생산하려니 막무가내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부른 배를 부여잡고 절 입구로 들어서니, 절 옆 개울가에 꽃무릇(석산, 石蒜)이 지천이다. 꽃무릇과 흡사한 꽃에 상사화가 있는데, 잎과 꽃이 함께 달리지 않는 것과, 무릇은 무릇인데, 석산은 가을 가재무릇이고, 상사화는 개 가재무릇인 것이 같은 점이고, 석산은 붉은색에 가을꽃이고, 상사화는 홍자색에 여름꽃이요, 석산의 꽃말은 참사랑이고, 상사화의 꽃말은 기대라 는 점이 다르다.

 

한편, 길가의 밭 한 모퉁이에 선 시비 하나 길손을 반긴다. 살펴보니 이 고장 출신 서정주(1915~2000) 시인의 선운사 동구라는 시다. 동구(洞口)는 동네 어귀, 절로 들어가는 산문 어귀일 것이나 여기서는 동백꽃을 보러 간다는 뜻도 있겠고,……, 여기 옮겨보면,

 

선운사(禪雲寺)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시인은 동백꽃을 보러 고향(고창 질마재)인 선운사에 갔지만, 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들만 아른거린다. 덧없는 시간은 흐르고, 잃어버린 세월은 그리움으로 남는다. 육자배기 가락이 목에 쉬어 남아있다.

 

시인은 1942년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갔다가 상()을 마치고 주막집에서 마흔쯤 되는 주모와 술 대작을 하다가 육자배기 한 가락에 홀딱 반했으나,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돌아섰다가 10여 년이 지나서 다시 찾아가 보니 그 주모는 6.25 전쟁 중에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만 듣게 된다.

 

감성이 풍부한 시인은 어찌 붓을 들지 않았겠는가. -다음 Cafe <빗새의 문학관> 참조함.

 

이어서 아산면 상갑리에 고인돌이 떼로 있다는데, 갈 길이 멀어 다음을 기약하고 넘어간다. 고인돌은 2,500년 전부터 약 500년간 이 지역을 지배했던 족장의 가족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 이전의 빗살무늬토기 인들이 강가에 생활했던 것과는 달리 이들은 들판에서 살았던 것이리라. 수렵 생활에서 농경사회로 넘어가는 중이었으니,2-1)-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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