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황금기를 연 것은 전쟁이었다. 페르시아전쟁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두 번 승리함으로써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는 폴리스로 도약했다. 페르시아 제국과 그 후예들은 열 번 넘게 그리스와 전쟁을 했는데, 변명할 여지 없이 참패한 전투는 딱 그 두 번이었다.
그 현장에 가고 싶었지만, 마라톤 평원은 볼 것도 없다 하고, 투어버스도 없어서 포기했다. 살라미스 해협은 한참 뒤에 <알쓸신잡> 촬영 때 가보았는데, ‘역사 덕후’나 ‘밀리터리 덕후’가 아니라면 굳이 갈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페르시아전쟁은 아테네의 번영과 몰락 과정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콘텍스트여서 간략하게 마나,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는 B.C, 490년, 조공 바치기를 거부한 아테네에 본때를 보이려고 병사 2만 명을 함선 600척에 태워 보냈다. 아테네의 자유민과 농민 1만 명은 사흘 먹을 식량을 챙겨, 북동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해안의 마라톤 평원에 진을 쳤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의 전술을 모른 채 전투에 임했다가 쓴맛을 보았다. 갑옷과 커다란 방패로 몸을 가린 아테네 중장보병은 8열 직사각형 밀집 대형을 이루어 전진하면서 긴 창으로 적을 찔렀다. 한낮의 백병전은 앙숙 스파르타가 공동의 적을 막기 위해 보낸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아테네의 압승으로 끝나버렸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 병사는 6천400명이나 죽었지만, 아테네의 전사자는 겨우 192명이었다. 발 빠른 병사가 쉬지 않고 달려 아테네에 승전보를 전하고 쓰러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인지 아닌지, 여부를 알 수 없다.
싸울 힘을 지닌 아테네 남자는 거의 다 마라톤 평원에 있었다. 게다가 페르시아 함선이 다른 방향에서 아테네를 공격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중장보병(重裝步兵)은 아테네 남서쪽 해안으로 급하게 이동해야 했다.
페르시아 전함들은 먼저 도착한 아테네군을 발견하고 퇴각했지만, 그때까지는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던 만큼 목숨 걸고 달려서 승전보를 알려야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소문은 아무 근거가 없어도 진실로 받아들여져 신화로 격상되는 법, 아테네 시민들은 승전을 기념하는 장거리 경주를 만들었고, 그것이 2천 500년 후 42.195킬로미터를 달리는 근대 올림픽의 마라톤으로 부활했다.
-유시민의 『유럽 도시 이야기 1』 49~50쪽에서, 각설하고 올레길을 걸어보자.
▲길은 해수욕장 끝자락에서 바로 행원리로 이어졌다. 행원리 밭담 길을 지나 포구에 다다르니 포구는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그런 포구에서, 여기가 광해 임금이 제주에 입도한 곳이라는 표시판을 대하니 갑자기 우울해진다.
쫓겨난 임금이 이곳으로 올 즈음이 한양의 삼전도에서는 새 임금(인조)이 청나라의 <타타라 잉굴다이(용골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알고나 있는지, 광해 임금은 강화에서 천 리 머나먼 제주로 오면서 칠언시(七言詩) 한 수를 남겼다. 여덟 행 중에 마지막 두 행을 읽어보자.
*고국존망 소식단(故國存亡 消息斷)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연파강상 와고주(烟波江上 臥孤舟) 안개 자욱한 강 위에는 외딴 배만 누웠구나.*
누워있는 외딴 배(孤舟)는 임금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그 임금이 지금의 임금이던가, 전 임금이던가, 아니 둘 다일는지 모른다.
임금이 입항한 포구가 이렇게 초라하다니, 하긴 그때 광해는 임금이 아니었지, 그날 임금은 이곳 행원리 어디에서 하룻밤을 유(流)하고 <제주성> 안 망경루 서쪽 배소(配所)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만 4년을 제주에서 살았고, 그때 임금의 나이 67세였다고 표시판이 기록하고 있다.
차가운 유배지에서 부인과 아들 내외를 저승으로 먼저 보낸 그 슬픔은 어찌할 것이며, 나라를 걱정하는 임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매기 한 마리가 표시판 위에서 하늘을 날아오른다.
파란만장한 임금의 한 세상을 이 섬이 품었으니 어찌 한이 없겠는가. 나는 표시판을 잡고 한참을 바다만 바라보다가 몽롱한 마음을 품고 길을 걸어 나갔다.
길은 차도를 조금 걷고 차도를 벗어나 바다 쪽으로 들어가서 현무암 바위 위를 걷는다. 이어 다시 차도로 올라온 길은 해안 길로 이어졌다.
한참 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 지점에서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올레길을 벗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그때 나는 광해 임금의 생각에 잠겨 길을 알아차릴 정신이 아니었다. -42)-계속-
<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44 (12) | 2024.09.28 |
---|---|
<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43 (7) | 2024.09.27 |
<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41 (7) | 2024.09.24 |
<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40 (3) | 2024.09.23 |
<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39 (16) | 2024.09.22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