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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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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석봉1 2024. 9. 1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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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건축과 예술을 모르며, 유럽 역사를 연구하지도 않았고, 여행 경력도 변변치 않다. 이런 책을 써도 되는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여행을 다녔다. 다만, 책 읽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 견지해 온 원칙을 적용하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문자 텍스트를 읽을 때, 나는 콘 텍스트를 함께 살피려고 노력했다. 그 텍스트를 쓴 사람이 언제,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목적을 품고, 왜 하필 그런 방식으로 썼는지 알아본다. 그러면 글쓴이와 깊게 교감할 수 있다. 여행하면서 알게 되었다. 도시의 텍스트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여행을 다니는 동안 컴퓨터와 인터넷을 만들고 이동통신 기술을 개발한 과학자와 엔지니어, 검색엔진을 제공한 기업인들이 늘 고마웠다. 26년 전 유럽에 첫발을 들였을 때는 전적으로 책과 지도에 의지해서 다녔지만, 지금은 스마트폰만 들고 다닌다. 검색엔진으로 언제 어디서든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책이 전연 필요 없다는 건 아니다. 도시의 역사와 구조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특정한 건축물과 공간과 사건과 사람에 관한 세부 정보를 찾을 때는 포털 사이트와 검색엔진이 비할 바 없이 편리했다.

 

이동 경로와 시간 계획을 짜고 교통편을 물색할 때도 그랬다.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이나 건물과 마주쳤을 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메모를 보면서 글을 쓰다가 수시로 검색엔진을 가동한다.

 

유시민의 유럽 도시 기행 1, (생각의 길, 2019) 서문에서 인용.

 

각설하고 올레길을 걸어보자.

 

시린 눈을 감고 거센 바람에 앵앵거리는 귀를 막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겼다. 몽돌을 울린 바람은 또 숭숭한 밭담을 타고넘어 작은 포구 쪽으로 달린다.

 

포구는 희색의 모래와 검은 자갈을 머금은 해변으로 이어진다. 이름하여 <이호테우> 해변이다. <이호>는 마을 이름이고, <테우>는 옛사람들이 고기잡이하던 배의 이름이니 <이호테우>는 제주어의 합성어다.

 

해변은 활처럼 굽어 마치 초승달이 낮잠 자는 것처럼 포근한데, 저 너머에 바다 한가운데는 빨간색 하나, 하얀색 하나, 두 마리 긴 목마가 수호신 인양 오뚝 서 있다. 저 목마에는 군사를 숨기지 않았는지 궁금도 하다.

 

트로이의 목마는 군사를 숨기고 쳐들어가서 <일리아드>를 멸망시키고 <오디세우스>라는 영웅을 탄생시켰지만, 이 목마는 또 어떤 영웅을 만들 것인가? 규모는 비길 바가 아니지만,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생각나는 분위기다.

 

<이호> 마을을 지나니 단아한 포구로 이어진다. 여기서는 잠수함도 타고 요트도 타는 작은 항구급 포구다. 선창(船艙)<추억애(追憶愛>라는 거리엔 굴렁쇠 놀이,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팽이치기, 딱지치기, 말타기의 조형물들이 옛 추억을 되살린다.

 

그 옛날 어린 시절 고향의 뒷동산에 소 먹이러 가서 팽이치기, 딱지치기, 말타기하던 그때가 아련하다. 놀이기구에 매달려 있는 관광객들의 추억 놀이 모습도 천진스럽다.

 

<추억애> 거리를 지나 항구 끝머리에 터 잡은 식당가에서 가격에 밑지지 않는 점심을 맛있게 먹은 후, 커피 한 잔을 덤으로 마시고 포구 위의 아담한 구름다리를 건너 해발 65m의 아주 작은 오름 하나에 올라섰다.

 

제주의 머리, <도두봉(道頭峰)>! 작아서 예쁜 봉에 오르니 사방이 시원하다. 바다도 시원하고 공항도 시원하고, 멀리 백설 속의 한라산은 더욱 시원스럽다. 무시로 뜨는 비행기를 보내면서 봉에서 내려오니 소탈한 사찰 하나, 참 한가롭다. 절 입구 바위에 <장안사>라고 음각으로 되어있다. -32)-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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