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길 위의 풍경 -9코스(대평~화순 올레)
제주 올레 3일 차, 오늘 제주의 아침은 설국 세상이었다. 중산간 이상의 온 천지가 백설이다. 잣나무며 소나무며 벚나무며, 모든 나무에 눈꽃은 내려서 눈이 부시고, 길 위는 걷기에도 미안할 정도로 맑았다.
-입도 삼십 년 만에 처음 보는 아름다운 눈꽃이여!
남원읍의 중산간 지역에 자리한 숙소 이웃 <유자 농장> 주인 할머니가 한라산을 바라보며 한 말씀이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하늘, 바람기 하나 없는 햇살, 제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겨울 날씨.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환상적(幻像的) 그대로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던가, 어부인(어렵고 까칠한 부인 혹은 어질어 빠진 부인)이 귀가 왱왱거리는 것이 영 걸린다고 하소연이다. 이틀 동안 무리했는가, 언젠가 달팽이관이 탈이 나서 입원한 일이 있었는데, 혹시?
서귀포 중앙로터리에 접한 건물 3층에 있는 이비인후과에 들렀다. 예상했던 대로 약 먹고 안정을 취하란다. 안정? 의사의 처방대로 따지자면 걷기를 중단하고 쉬어야 한다. 난감하다. 아마도 이틀 동안 걸었으니, 몸에 무리가 왔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 혼자 걸을 수도 없고, 당초에 오늘은 10코스를 걸을 생각이었는데, 어부인의 의견을 물으니
-약 먹었으니 천천히 걸으면 되겠지요.
-그럼, 짧은 9코스를 걸을까?
힘들면 중간에 포기하기로 하고, 어부인도 오케이! 9코스는 7.5 km, 제주 올레 중에서 가장 짧은 길이다. 난이도는 중간이었다.
시발점인 대평마을 버스 종점에 내리니, 참 정갈한 마을이 우리를 반긴다. 10분쯤 걸어 포구에 다다르니 포구는 바람 한 점 없이 포근하고, 저기 박수기정은 대장군처럼 높고 길다.
용왕이 만들었다는 박수기정, 박수는 바가지 물이요, 기정은 절벽이란다. 우물은 숨어있다는데 보이지 않고 기정은 주상절리(柱狀節理)다.
한적한 포구에 허름한 식당이 있어 이른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는 언제나 허름한 식당을 좋아한다. 간판은 <해녀 올레>, 그러나 누가 이 집을 허름하다 하는가, 겉은 허름할지언정 속은 알이 더없이 탄탄하였다.
해삼 소라 멍게를 섞은 한 접시와 막걸리 한 사발, 거기에 성게죽 한 그릇과 귤 한 개씩을 먹고 난 소감은 부부가 일치했다. 갑오년 들어 최고의 점심 식사!
코스 초입에 들어서니 길은 좁고 가파르고 울창하다. 그러나 길바닥에 박힌 돌들은 얼마나 오래 닳았는지 반들반들하다. 바로 이 길이 그 옛날 몽골군이 말몰이 길로 이용했다는 <몰질>이다.
중산간에서 기른 군마(軍馬)를, 포구를 통해 몽골로 실어 나르기 위한 길이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착취도 그런 착취가 없어 보인다.
숲속을 숨차게 기어오르니 희색 빛 하늘 아래, 드넓은 평원이 가슴을 틔운다. 뒤로 돌아서서 오던 길을 돌아보니 저 발아래, 해안선에 감싸인 정갈한 마을과 넓은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주에 이만한 평지가 있었던가? 의아스럽다.
이곳이 바로 용왕 난드르, 용왕이 바다에서 나온 들(野), 혹은 바다로 뻗어나간 들(野), 이름하여 대평(大平), 큰 평야, 그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고깃배들이 촘촘한 군단을 이루며 형제섬을 감싸고 있다.
비는 그쳤으나 날씨는 검었다 희기를 반복하는데, 먼데 바다 위에 길고 오뚝하게 선 산, 그 이름도 빛나는 산방산인가, 송악산인가, 가까이 있는 산은 산방산이요 멀리 있는 산은 송악산이 분명하다는데, 두 산 모두 그 모습이 기이하다.
아무튼 저 멀리 송악산 너머로 왼쪽으로 아련히 누워있는 작은 막대기 하나, 아니 둘이다. 대한의 끝 섬, 가파도와 마라도가 분명하다. 여기는 구름으로 흐린데, 어찌하여 저기는 햇빛이 반짝일까. 가파도여! 마라도여! 나는 무심결에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하였다.
“오늘 걷는 보람 있제? 여보!” 내가 한 말인가? 어부인이 한 말인가? 또 걸었다. -13)-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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