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가 또 굵어진다. 마침, 쓰고 있는 모자가 계절에 맞지 않아서 겨울용 두툼한 방수 털모자 하나를 샀다. 빈손으로 나오지 않으니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기분이 좋다.
길 건너편의 보말(바다 고둥) 국숫집 간판을 보니 시장기가 다가온다. 들어가서 칼국수를 시켰다. 이내 나온다. 칼국수는 어부인의 단골 메뉴다. 따뜻한 보말칼국수 한 그릇 비우니 온몸도 따뜻하다. 국수 먹고, 홍시 몇 개와 커피 한 잔을 서비스받고 보니 더욱 정다움이 스며들었다.
젊고 예쁜 여주인에게 올레길을 또 물었다. 길이 복잡한 읍내에는 길 찾기가 쉽지 않은 법이니 만사 불여튼튼이라는 생각에서다.
따뜻한 국숫집을 나서서 마을 길과 들길을 한참을 걸었다. 길은 차도를 건너서 산길로 접어든다. 산길 초입에 작은 정자가 올레꾼의 쉼터다. 마침 중늙은이 한 사람이 정자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눈인사만 하고 산을 향해 계속 걸어 올랐다. 날씨도 계속 <냉온 탕> 중이고, 걷는 산길은 편안한데 몸에서는 한기(寒氣)가 돌았다. 한기를 참으며 오름에 오르니 정상의 시야는 한없이 넓었다.
오름은 대수산봉(大水山峰), 해발 137.3m, 일명 <큰물뫼>, 표고는 낮으나 산은 높았고, 정상에 오르니 성산 일출봉과 제주도 동쪽 해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마포>에서 <섭지코지>에 이르는 해안선이 환상적이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밀물 때마다 <터진목> 부근이 물에 잠겨 일출봉이 섬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한편, <대수산봉> 정상에 봉화대가 있으니 이름 있는 산이다. 봉화대(烽火臺)나 봉수대(烽燧臺)는 불이나 연기로 적의 침입을 알리는 신호 수단으로 올레길을 걸으면서 가끔 만날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시야가 흐려진다.
날씨가 계속 좋았다면 저 멀리 소의 형상을 하고 누워있을 우도와 태평양을 바라보며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의 일출봉을 원 없이 보는 건데 아쉽다.
<대수산봉>을 오르고, 내려오는 길목에 펼쳐지는 겨울 제주의 푸른 밭은 애초부터 육지의 그것에 비길 바가 아니다. 흰 눈 속의 푸른 밭, 상상키 어려운 한 폭의 그림 그 자체다.
게다가 불끈불끈 땅 위로 돋아난 무 들의 향연, 연록의 마늘밭, 잡초와 함께하는 감자, 양배추, 케일. 아 어찌 이런 풍경을 ……, 꿈엔들 잊을거나.
그리고 또, 흑룡만리라 불리는 검고 높은 돌울타리로 둘러싸인 노란 감귤밭은 제주가 아니고서야 어디에서 볼 수 있으랴. 겨울의 푸른 채소, 제주 농민들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확인한 셈이다.
먹지 않아도 배부른 길을 걸어 오름의 밑자락에 이르니 오싹했던 긴장이 풀린다. 우리는 푸른 밭, 검은 담벼락에 기대어 잠시 바람을 피하면서 준비한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데, 마침 정자에서 만난 올레꾼이 급하게 다가온다. 11)-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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