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3일(무신/3월 25일)
흐리다가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우수사가 와서 만났다. 아침 식사를 한 뒤에 원균이 왔고, 순천 부사(권준), 광양 현감(어영담), 가덕 첨사(전응린), 방탑 첨사(이순신)도 왔다.
아침 일찍 소비포 권관(이영남), 영등포 만호(우치적), 사량 첨사(이여념) 등이 와서 보았다. 원균의 그 흉악하고 음험함을 무어라 표현할 수 없었다.
최천보(崔天寶)가 양화(楊花, 양평 양화진)에서 내려와서 명나라 군사들의 소식을 상세히 전하고, 조도어사(調度御史, 세금을 거두는 일을 감독하는 관직)의 편지도 전한 뒤에 그날 밤 돌아갔다.
2월 24일(기유/ 3월 26일)
맑다. 새벽에 온양(溫陽)과 아산으로 보낼 편지와 집에 보낼 편지를 써서 함께 보냈다. 아침에 출항해서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니 비가 몹시 퍼부어 곧장 다다를 수 없으므로 배를 돌려 칠천량으로 돌아왔다.
비가 그치고 나서 우수사 이영공(李令公, 이억기)과 순천 부사, 가리포(加里浦) 첨사, 진도 군수 성언길과 함께 장막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 8시쯤 배를 만드는 기구를 들여보내기 위한 문서와 흥양으로 보낼 공문을 써서 보냈다. 쌀 90되로 말갈기(말총)를 바꾸어 보냈다.
2월 25일(경술/ 3월 27일)
맑다. 서풍이 거세게 불어 배를 띄우지 못하고 칠천량에서 머물렀다.
2월 26일(신해/ 3월 28일)
바람이 온종일 거세게 불어 그대로 머물렀다.
2월 27일(임자/ 3월 29일)
맑으나 바람이 거세다. 우수사 이억기와 담소를 나누었다.
2월 28일(계축/ 3월 30일)
맑으며 바람도 없다. 새벽에 출항해서 가덕에 도착하니, 웅천의 적들은 기가 죽어 대항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 배가 바로 김해강(金海江, 부산시 강서구 서낙동강) 아래쪽 독사리항(禿沙里港, 부산시 강서구 명지동)으로 향하는데,
우부장이 변고를 알려왔다.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달려가 작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 경상 우수사 군관과 가덕 첨사의 탐후선 2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는데 돌아가는 사정과 상태가 터무니없었다. 흑흑
배 2척을 붙잡아 매어 경상 우수사 원균에게 보내니, 수사가 크게 화를 냈다. 그의 본뜻은 군관들을 보내어 어부들이 건져 낸 수급(首級)을 취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저녁에 아들 염(苒, 이순신의 셋째 아들)이 왔다. 사화랑에서 잤다.
주) 아들 염은 이순신의 셋째 아들로 후에 면(葂)으로 개명하였고 명량해전 이후 어머님을 모시다가 아산집에 있다가 분탕질하는 왜적을 공격하다가 길에서 21세의 나이로 왜병의 칼을 맞고 전사하였다. 흑흑흑
2월 29일(갑인/ 3월 31일)
흐리다. 바람이 몹시 불어 배를 칠천량으로 옮겼다. 우수사 이억기와 순천 부사, 광양 현감, 경상 우수사도 와서 만났다.
2월 30일(을묘/ 4월 1일)
종일 비가 내렸다. 배의 거적 지붕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66)-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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