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9일(갑진/ 3월 21일)
맑다. 하늬바람(서풍)이 세게 불어 배를 띄울 수가 없어 그대로 사화랑(沙火郞)에 머물렀다. 남해 현령(기효근)에게 붓과 먹을 보냈더니 저녁에 그가 와서 사례를 했다. 고여우(高汝友)와 이효가(李孝可)도 함께 와서 보았다.
2월 20일( 을사/ 3월 22일)
맑다. 새벽에 출항하자 샛바람(동풍)이 약간 불더니 적과 싸울 적에는 바람에 거세게 불어 배들이 서로 부딪쳐 부서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호각을 불게 하고 초요기(招搖旗)를 올려 싸움을 중지시키니,
여러 배들이 다행히 크게 상하지는 않았으나, 흥양의 1척, 방답의 1척, 순천의 1척, 본영의 1척이 깨어졌다. 날이 저물기 전에 소진포(蘇秦浦)로 돌아와서 물을 긷고 밤을 지냈다. 이때 사슴 떼가 동서로 달려갔는데 순천 부사(권준)가 1마리를 잡아 보냈다.
주) 초요기(招搖旗)는 전쟁이나 행군할 때 대장이 장병들을 지휘하는 데 사용한 군기다. 샛바람, 하늬바람 등은 뱃사람들이 사용하는 말.
2월 21일(병오/ 3월 23일)
흐리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이영남과 이여념이 와서 만났다. 우수사 원균과 순천 부사, 광양 현감(어영담)도 와서 함께 보았다. 저녁에 비가 오더니 자정께 그쳤다.
2월 22일(장미/ 3월 24일)
새벽에 구름이 검더니 샛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적을 무찌르는 일이 급하므로 출항해서 사화랑(砂火郞)에 이르러 바람이 멎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멎는 듯해서 재촉하여 웅천에 이르러 삼혜(三惠)와 의능(義能) 두 승장(僧將)과 의병 성응지(成應祉)를 제포(薺浦,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로 보내어 곧 뭍에 내려가는 척하고,
또 우도(右道)의 장수들도 시원치 않은 배들을 골라서 동쪽으로 보내어 곧 뭍에 내리는 척했더니 왜적들이 허둥지둥 도망쳤다.
이 틈을 타서 모든 배를 몰아 곧바로 무찌르니 적들은 세력이 분산되고 약해져서 거의 섬멸되었는데, 발포의 배 2척과 가리포의 배 2척이 명령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갑자기 들어가다가 얕은 곳에 좌초되어 공격받으니 참으로 원통하고 분하다. 흑흑
잠시 뒤 진도의 상선(上船, 판옥선) 1척도 적에게 포위되어 나포되기 직전에 우후(이몽구)가 곧장 달려가 구해냈다.
경상 좌위장(左衛將)과 우부장(右部將)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까지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을 이루 표현할 수 없어 정말로 개탄스럽다. 이 일로 우수사(원균)를 꾸짖었었다.
오늘의 원통하고 분함을 어찌 말로 다 하랴, 모두 경상 우수사(원균) 탓이다. 돛을 달고 소진포(蘇秦浦)로 돌아와서 잤다. 아산에서 뇌(蕾)와 분(芬)의 편지가 웅천 진중으로 왔고, 어머니의 편지도 왔다.
주) 뇌(蕾, 1561~1648)는 이순신의 맏형 이희신(李羲臣)의 장남이고, 분(芬, 1566~1619)은 이희신의 둘째 아들인데, 임진왜란 때 성천(成川)으로 피난하여 정구(鄭遘)에게 학문을 배우고 이순신 진영에 합류하여 문서를 담당했다. 《이충무공행록, 李忠武公行錄》을 저술했다. -65)-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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